인문과학 반민특위의 발족에서 와해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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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의 발족에서 와해까지
한국근현대사는 민족의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할 시기에 분단체제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민족의 수난과 고통은 제국주의의 침략이 결정적인 원인이었지만, 제국주의 침략에 호응, 협조한 반민족세력은 내적 원이이었다. 이들은 식민지하에서는 친일파였으며, 해방정국과 분단체제 하에서는 극우반공세력이었다. 친일파와 극우반공세력은 서로 다른 집단이 아니라, 극우반공세력의 핵심은 친일파가 해방 후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형성된 동일 집단이었다.
친일파는 한말 개항이후 일제의 침략과 강제 병합에 협력한 자, 일제시기에 관리·경찰·헌병·군인 등으로 활동하며 일제 지배에 적극 협력한 자, 민족해방운동을 탄압하거나 방해하는 데 적극 앞장선 자, 내선일체 등을 주장하며 황국신민화운동에 앞장선 자,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강연과 헌금과 헌납 등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자, 일제의 침략전쟁을 이용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징용·정신대·종군위안부·징병과 각종 공출을 자행하거나 적극 협력한 자 등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친일파는 35년이라는 장기적인 신민지 지배 속에서 일제식민지 지배정책을 미화·선전하거나, 민족을 탄압하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민중을 강제로 동원했던 반민족적, 반민주적, 반민중적 존재였다.
해방 후 친일파의 처리문제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었다. 첫 번째는 일제하에서 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자를 처벌하여 무너진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고 정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우리 민족에게 부여된 자주적 통일민족 국가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친일파의 속성은 일제하에서 드러났듯이 친일파에게 권력의 성격은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며, 오로지 자신의 생존과 기득권을 유지시켜 준다면 권력에 빌붙어 다시 반민족행위를 저지를 수 있었기 때문에 국가건설 과정에서 반드시 배제되어야 했다. 즉 자주적인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제조건이었다.
그러나 미국의 대한정책으로 친일파가 미군전의 요직에 기용됨으로써 친일파 처리문제는 난관에 부딪쳤다. 미국의 대한정책은 조선을 소련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일차목표였으며, 조선의 독립은 이차적 목표라고 규정하였다. 미군정은 일제시기 조선인 관리들이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한 것처럼 미국을 위해서도 충성을 다할 것이라는 판단 하에 군정 관리로 기용하였다. 미군정기 동안 행정, 사법, 경찰, 군의 고위 관리 대다수가 일제시기 관리이자 군인이었으며, 일부는 친일 단체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었다. 일제 조선인 관리의 기용은 단순히 군정 관리고서의 문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미군정기 동안 사회 각 분야에서 다시 친일파가 등장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게 되었다. 일제 조선인 관리를 모두 친일파· 민족반역자라고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친일파 처리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즉 친일파 처리문제가 제기 되었을 때 이를 반대하는 입장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미군정의 친일파 기용이 친일파 처리의 좌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기용함으로써 친일파 처리가 어렵게 된 것은 아니었다. 미군정이 친일파를 기용함으로써 친일파 처리원칙을 합의했다면, 친일파 처리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세력의 입장은 합의하기 어려울 만큼 달랐다. 이승만과 한민당은 친일파 처리를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며, 한만당의 주요 인물은 친일파 처리의 대상이었다. 이 때문에 한민당은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물과 독립운동단체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며 활로를 마련해 갔다. 이승만은 일제시기 해외에서 활동한 관계로 국내의 정치적, 경제적, 조직적 기반이 취약했기 때문에 한민당을 비롯한 친일파를 자신의 주요 기반으로 삼았다. 이는 필연적으로 친일파 처리의 반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은 친일파 처리문제를 민족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입장에서 접근하기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실현하려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친일파 처리문제에 대한 이승만의 입장은 미군정기에 친일파 처리가 좌절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임정은 친일파 처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이 없었다. 경우에 따라 친일파 처벌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친일파의 처벌을 국가 건설 후로 미뤄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궁극적으로 임정은 친일파 처리에 소극적이었으며, 오히려 친일파를 활용하는 입장이었다. 임정은 취약한 국내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친일파를 적극 끌어 들였으며, 이는 ‘선친일파 처리 후국가건설’과 ‘선국가건설 후 친일파 처리’의 결과는 동일하다는 인식으로 나타났다. 또한 임정은 친일파 처리문제를 포함한 제반 정책에서 지나치게 독선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세력이 약화 되었다. 임정은 좌우 정치세력의 협력을 모색하기보다는 우파세력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 때문에 임정의 한 축을 이루고 있던 민족주의 좌파세력은 임정이 전 민족의 영도적 입장을 포기하였다고 비판하면서 탈퇴함으로써 임정은 사실상 해제 되었다. 임정의 이러한 입장은 지나치게 임정법통론을 내세우며 국가건설을 임정 중심으로 이루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여운형의 친일파 처리에 대한 인식은 원칙적으로 정부수립 과정에서 친일파를 배제해야 하지만 처리범위는 최소화하자는 입장이었다. 이것은 조선인민당이 근로 대중을 중심으로 진보적이고 양심적인 지주·자본가까지 포괄하는 대중정당이로고 표방한 것처럼 악질적인 친일파를 제외한 좌·우 세력을 망라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려는 노선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민당의 친일파 처리에 대한 입장은 당시 정세를 고려한 정당하고도 올바른 것이었지만, 극단주의가 횡행하는 정국에서 현실적인 힘을 얻기는 어려웠다.
조공은 다른 어떤 세력보다 친일파 처리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친일파 범위를 제시하지 못한 채 친일파 처리와 배제를 강력히 주장하면서 몇 차례 이승만, 김구와의 협상 결과를 가지고 이들을 ‘친일파의 우두머리’, ‘파시스트’, ‘민족분열의 책임자’라고 맹렬히 비난하였다. 이는 친일파·민족반역자의 처리문제를 민족적 과제의 해결이라는 측면보다는 정략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하였다.
친일파 처리문제는 조공에게 더 많은 지지기반을 확보하여 통일전선을 이루어낼 수 있는 문제였지만, 정략적인 이용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통일전선의 결성을 가로막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조공은 악질적인 친일파는 배제해야 했지만, 모든 친일파를 무조건 배제하기보다는 이들의 반성이나 참회를 통해 통일전선에 참여케 하는 포용적인 자세를 가져야 했다. 결국 대다수의 친일파가 극우반공세력에 가담하여 적대세력화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결국 해방정국기 친일파 처리에 대한 각 정치세력의 입장과 목소리는 달랐지만, 속뜻은 하나였다. 즉 민족의 장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과 목표를 위한 통일전선의 결성보다 정치적 패권의 장악이라는 정략적 이해를 우선시한 것이었다.
1945년 12월말에 불거진 신탁통치문제는 친일파 처리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반탁운동에 참가한 시민들의 대다수는 완전한 독립과 자주적 정부수립을 열망하는 순수한 민족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이와는 달리 임정과 군정 관리, 친일파의 반탁운동은 정략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경찰을 비롯한 군정 관리들이 반탁운동과 임정 추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유는 민족적 감정에 편승하여 친일파 처리문제로 곤경에 빠져 있던 자신들의 위기를 모면하려는 기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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