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이백과 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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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백과 두보
시선 (詩仙)이백 (701~762)
천재와 광인을 가름하는 선은 명백히 긋기가 어렵다고 한다. 나는 원래 초나라의 미치광이라고 자칭한 이백은 너무나 비범하고 뛰어난 천재라고 하겠다. 이백은 당나라 사람으로 측천무후 장안 원년에 태어나 숙종 보응 원년에 향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신선(神仙) 검술(儉術) 협객, 주객, 시인 등 여러 가지 성격을 한 몸에 지닌 사람이다. 재기가 넘치고 자유 분방하고 박학(博學)하였다. 한마디로 당나라 시대의 시인들 중에서도 가장 찬란한 빛을 발했던 밝고 큰 별이었으며 후세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시선(詩仙)이라고 일컬었다.
이백은 중국 낭만파 시인들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초사이래로 낭만주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작품에는 이상주의와 영웅적인 기개, 그리고 반역 정신이 드러나 있다. 이백 작품의 최대 특색은 일찍이 중국의 시인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호방한 기상이다. 그는 똑똑하고 활달했으며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인물이었다. 시를 짓는데 있어서도 미세한 조탁(彫琢)이나 대우법(對偶法) 같은 작사상(作思想) 의 기교보다는 큰 칼과 도끼로 거친 가지와 넓은 이파리를 다루는 듯한 수법으로 대했으며 중국의 시가에서 보기 드문 문학적 경계를 그려내고 있다.
그의 작품 중에는 담백하고 고요한 산수시가 있고 기상이 웅장한 악부시도 있다. 오언(五言)이던 칠언(七言)이든, 길고 짧음을 막론하고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어떠한 격률(格律)의 지배나 구속을 추호도 받지 않았다. 동시에 감정이 풍부하고 열렬하여 어떤 중국인도 따라가지 못하였다. 그래서 이백은 명실공히 그 시대의 낭만적 사상과 생활, 나아가서는 낭만주의문학을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1.이백의 약전
이백의 선조는 농서 성기 사람이라고 하나 확실치가 않고 대략 수 말에 그의
원조(遠祖)가 죄를 얻어 서역으로 유배되었고 약 백년 후인 당 신룡 초(705년 경)에 이백의 아버지가 촉으로 몰래 돌아와 살았을 것이라고 한다. 이백의 아버지를 이객이라 한 것도 그가 객지에 기우함으로 세인들이 객이라 불렀을 것이다. 따라서 이백의 출생지에 대하여도 명백한 설을 얻기 어렵고 또한 이백의 어머니가 한(漢) 호 (胡)의 사람이냐 하는 엇갈린 견해도 있으며, 이백이 한 호의 혼혈아일 것이라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이백의 자를 태백이라 함은 그의 어머니가 꿈에 태백성을 보고 그를 출산한 까닭이라고 한다. 한편 그가 청련거사라고 자호한 것은 다섯 살 때부터 정착하고 성장했던 촉의 창명현 청련향에 대한 애착이었으리라.
이백은 어려서 그의 부유한 아버지 덕으로 학문, 기예를 마냥 습득할 수 있었다.20세 전후에 협객이나 도사들과 어울려 민산에 은거했으며 성도 아미산 등지를 유력했고 26세 때에는 “한 자루의 칼을 지닌 채 양친에게 하직하고 고국을 떠나 멀리 유력하여 ” 사나이 대장부의 큰 뜻을 사방에 펴고자 했던 것이다.
고향인 촉을 떠난 이백은 동정, 상수 일대를 유력하고 금릉 양주 등지를 거쳐 오(吳) 월(越)을 돌아 안륙(安陸)에 와서 전에 제상을 지낸 허어사의 손녀와 결혼하여 한동안 정착했다.이때부터 이백은 그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정치적 현실참여를 갈망하고 여러 사람을 찾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노상 실망에 빠졌으며 산동에서는 공소보 등 5명의 은사와 같이 조래산에 은퇴하여 술과 시가로 세월을 보냄으로써 죽계육일(竹溪六逸)의 한 사람으로 불리 우기도 했다.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낭만적인 약 10여년의 유력을 거듭한 이백은 마침내 절강으로 남하하여 도사 오균을 알게 되었고 그와 같이 염중에서 선술을 닦고 있었다. 그후 오균은 당현종의 부름을 받아 장안에 들어갔고 다시 오균의 천거로 드디어 한림학사로서 현종을 측근에서 받들게 되었다. 그때 이백의 나이는 42세었다. 그 후 이백은 장안을 떠나 낙양에 갔지만, 궁중의 타락과 부패에 실망만 하였다. 길지도 짤지도 않은 약 3년간의 궁중 생활에서 더욱 분만(憤)과 구토만을 느꼈다. 마침내는 자기보다 11세나 연하인 두보를 알게 되어 중국문학사상 불후의 두 시인이 불후의 우정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백과 두보의 교유는 길지 않았다. 서로 어울렸던 시간은 불과 6개울도 못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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