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병론 - 생애와 문학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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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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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온(深溫) ‘깊은 따뜻함’이라는 뜻이다.
천상병론
1. 생애와 문학 활동
천상병은 1930년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났다. 1938년 마산 상북초등학교에 입학하나 1939년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거주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한다.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의 눈에 띄어 1949년 시 「강물」 등을 『문예』에 발표하기도 한다. 또한 1949년 마산중학교 5학년 당시 중학교는 6학년제였다.
때, 시 공상 등이 『죽순』에 추천되기도 했다. 곧 한국전쟁이 터지고 그는 1951년 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 입학한다. 이 무렵 그는 송영택, 김재섭 등과 동인지 『처녀』를 발간하고, 『문예』에 「나는 거부하고 저항할 것이다」라는 제목의 평론을 내놓으며 시작(詩作)과 함께 비평 활동도 겸한다. 천상병은 1952년 『문예』에 시 「갈매기」로 추천을 받고 정식으로 문단에 나온다.
1954년 시인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을 4학년 2학기에 그만두고 문학에 전념한다. 이때 『현대문학』에 월평을 쓰는가 하면 외국 서적의 번역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다가 1964년부터 2년 동안 김현옥 부산 시장의 공보 비서로 일하는데,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 생활이었다. 이후 죽을 때까지 다른 직업 없이 오직 시인으로 살아간다. 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東伯林事件)은 1967년 7월 8일,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동백림’은 당시 동독의 수도였던동베를린을 한자로 음차한 것). 당시 중앙정보부는 대한민국에서 독일과 프랑스로 건너간, 194명에 이르는 유학생과 교민 등이 동베를린의 북조선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고 간첩교육을 받으며 대남적화활동을 했다고 주장했다. 중앙정보부가 간첩으로 지목한 인물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던 작곡가 윤이상과 화가 이응로, 천상병의 서울대 상대 동창인 강빈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천상병은 친구가 간첩임을 알았음에도 신고하지 않은 불고지죄 등으로 구속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훗날 천상병은 6개월간의 투옥 생활로 얻은 고문의 고통과 그 후유증을
“지금의 내 다리는 비틀거리며 걸어 다니지만 진실과 허위 중에서 어느 것이 강자인가 나는 알고 있다. 남들은 내 몸이 술 때문이라고 하지만 결코 술 탓만은 아니라는 것, 나만은 알고 있다. 나는 몇 번의 찢어지는 고통에서도 이겨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 라고 표현하였다.
에 연루되어 6개월여의 옥고를 치른다. 천상병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교도소에서 3개월 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런 취조를 받고 난 뒤 선고유예로 풀려난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병원에도 갔다 오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 된 그는 동료 시인들의 도움으로 살아간다.
1970년 겨울,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 동쪽 집에서 먹고 서쪽 집에서 잔다는 뜻으로 먹을 곳, 잘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며 이집 저집에서 얻어먹고 지내는 일 또는 그러한 사람을 말한다.
하며 떠돌던 천상병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1971년 봄이 다 가도록 종적을 감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의 안부를 궁금해 하는 몇몇 문인들이 연고가 있는 부산에 연락을 넣어왔지만 거기에도 천상병은 없었다. 그가 죽었을 것이라 추측한 시인들은 ‘요절 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해 이리저리 전갈을 넣어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잡지에 흩어져 있는 작품 60여 편을 모았고 시인 성춘복이 그 시집을 내주겠다고 선뜻 나서며 간행되었다. 1971년 12월 당시로는 호화 장정의 천상병 시집 『새』(조광, 1970)가 출간되었다. 이 시집은 신문이며 방송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 심한 음주로 인한 영양실조로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돼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 시립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버젓이 살아 있으면서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한 시인이 되었다.
병원에서 요양하며 몸과 마음을 추스른 천상병은 1972년 친구의 여동생인 목순옥과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1979년에는 첫 시집 『새』에 실린 작품들을 거의 다 옮겨 실은 시선집 『주막에서』(민음사, 1979)를 펴낸다. 이어 1984년에는 『천상병은 천상 시인이다』(오상사, 1984), 1985년에는 천상병 문학선집 『구름 손짓하며는』(문성당, 1985), 1987년에는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일선출판사. 1987)을 내놓는다. 1988년 만성 간경화증으로 입원한 그는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으나 불사조처럼 살아난다. 이후 그는 3인시선집 『도적놈 셋이서』(인의, 1989), 『귀천(歸天)』(살림, 1989), 시선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미래사, 1989), 시집 『요놈 요놈 요 이쁜 놈!』(1991), 동화집 『나는 할아버지다 요놈들아』(1993)을 펴낸다. 1993년 4월 28일 병든 몸으로 누워 있던 시인은 마침내 숨을 거둔다. 천상병이 고단한 이 세상의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가던 날, 의정부시립병원 영안실 밖으로는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다. 시인이 죽은 해, 그의 진짜 유고 시집 『나 하늘로 돌아가네』가 나오고, 3년 뒤인 1996년에는 『천상병 전집』이 간행된다. 2007년에는 「천상병 평론」이 간행되었다.
2.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지금까지 이루어진 천상병 시 세계에 대한 공통된 지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티 없이 맑고 순진무구하고 솔직한 서정시라는 것이다. 둘째, 세상을 투명하게 보고자 한 가난한 시인의 삶과 시가 일치한다는 것이다. 셋째, 시가 간결 · 명료하고 쉽게 쓰였다는 것이다. 넷째, 시 세계가 서정적인 전기 시와 즉물적인 후기 시로 나뉜다는 것이다. 천상병의 시는 주로 전기적 사실에 유의하여 1967년 동백림사건의 고문, 그 후의 실종과 유고시집 형식의 첫 시집 『새』 간행을 기점으로 크게 전기, 후기의 두 시기로 나뉘어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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