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성의 __ 마지막 황제 부의의 스승 존스턴이 기록한 제국의 최후 12장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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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2장 황제의 사부들
12장. 황제의 사부들
-중국 황제 사부의 지위-
매우 소수인 황족들(최고 등위 황족인 친왕들을 포함해서)다음으로 궁중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은 황제의 사부들이었다.
구중국-‘이민족’인 만주족의 궁정에서 마지막 피난처를 찾은 중국-에서는 제자가 스승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경의를 표한다. 외국인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 밑바탕에 깔린 원리이다. 특히 옛 전통을 멸시하는 신중국밖에 알지 못하고 그러한 중국밖에 관찰하지 못했다면 더욱 그렇다.
마틴W. A. Martin박사는 “이 나라만큼 교사의 직무가 존경받는 나라는 없다. 현실 생활 속에서 교사는 최고의 예우를 받을 뿐 아니라, 바로 교사라는 명칭 자체가 이론상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대상에게 붙이는 용어이다. 그래서 때로는 하늘[天], 땅[地], 임금[君], 어버이[親]라는 문자와 함께 비석에 새겨져, 존경해야 할 다섯 가지 주요 대상 중 하나로서 엄숙한 의식 속에 숭배된다”고 말하고 있다.
권위 있는 중국 고전 문헌 가운데 하나인 『예기』禮記로 눈을 돌려보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제자가 길에서 스승을 만났을 때에는 서둘러 가까이 다가가 인사를 해야 한다. 그때 스승이 말을 걸면 응답해야 하고, 스승이 잠자코 있으면 재빨리 그 앞에서 물러나야 한다.……
제자는 단순한 관행에 얽매이지 말고 스승을 돕고 섬겨야 한다. 그리고 스승이 살아계실 때에만 정성을 다해 모시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도 3년동안 진실한 마음으로 애도를 표해야 한다.…… 만약 임금이 백성을 교화하여 예의 바르고 훌륭한 사람들로 만들기를 원한다면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옥은 갈지 않으면 쓸모 있는 그릇이 될 수 없고, 사람은 교육을 받지 않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른다. 그러므로 옛날에 현군賢君은 튼튼한 기초 위에 국가를 세우고 그 백성을 다스릴 때에 교육을 첫 번째 책무로 삼았다.…… 임금은 스승에게 통치술을 배운다. 그러므로 스승을 잘 고르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 임금이 자기의 신하로 여기지 않는 두 사람이 있다. 하나는 왕실의 제사를 담당하는 자이며, 또 한 사람은 그의 스승이다. 스승이 천자에게 강의를 할 때에 북쪽을 향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바르고 적절한 규정이다. 그것은 스승의 직무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는 방법이다.
마지막 문장은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통치자가 언제나 북쪽을 등지고 남쪽을 향해 앉는 것이 관습이었다. 따라서 통치자를 알현하는 자는 북쪽을 향해야 한다. 이것으로 군주와 신하를 구별했다. 그러나 군신 관계와 사제 관계는 다르다. 그러므로 신하의 제자이기도 한 군주가 강의를 받을 때에는 스승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기를 바랄 수가 없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고대의 규칙이 황실 강학소 안에서 끝까지 지켜졌다는 것이다.
황제가 모든 사부들-외국에서 온 ‘오랑캐’일지라도-에게 하는 또 하나의 경의 표시는 사부가 입실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사부가 방의 중앙까지 나가서 가볍게 인사한 뒤에 황제와 사부는 동시에 정해진 자리에 앉는다. 수업 중에 사부가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거나 그 밖의 다른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에도 황제도 자리에서 일어나 사부가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선 채로 기다렸다. 또한 병상에 있거나 고인이 된 사부의 집을 황제가 직접 방문하는 것 또는 사부의 사후에 영전을 주는 것은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에서 황제와 사부 사이의 흉허물 없는 관계는 아마도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그 친구이자 스승인 마르쿠스 코넬리우스 프론토의 관계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에서 제사帝師의 지위는 로마에서의 특권을 가진 친구보다 높았다. 또한 제사는 총독이나 군기대신 못지않은 ‘고관’이었다.
이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다. 제사는 당연히 나라 안에서 가장 저명한 학자 중에서 뽑혔으며, 제사로 뽑혔다는 것은 가장 치열한 국가시험을 무사히 통과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사의 자격을 얻을 만큼 탁월한 학식을 가진 자는 거의 확실하게 이미 고위 관리가 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제사로서 궁중에 들어오기 전에 9품계 중에서 최고위에 해당하는 붉은색 ‘단추’를 이미 획득했을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제사는 틀림없이 그 품계로 오르게 되며, 아울러 초피괘貂皮(담비 가죽으로 만든 예복)와 쌍안화령雙眼花翎과 자금성 안에서 교자를 탈 권리 따위의 다른 영예도 받았을 것이다. 나중에는 아마 태자소보太子少保가 되고, 마지막에는 황태자의 수석 후견인인 태자태보太子太保가 되며, 사후에는 쿠파타이와 같이 ‘성현의 반열에 오르는’ 영예가 주어졌을 것이다. 심지어 질병이나 기타 사유로 사직을 해야만 한 경우에도(비행을 저지른 경우는 제외하고)그 은전과 제사-황제의 사부-라는 칭호는 평생 동안 유지될 것이다. 그는 늘 개인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권리를 가지며, 황제의 면전에서 언제나 의자에 앉도록 권유를 받으며 궁정의 모든 관리들로부터도 계속 현직에 있을 때와 똑같은 예우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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