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속요 - 정과정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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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속요 - 정과정곡
☆ 내용요약
작자 정서(鄭敍)의 호는 과정(瓜亭)이고, 동래 사람이다. 고려 인종 때 임금의 총애를 받아 중앙정계에서 대활약을 했다. 그러나 의종(1146~1170)즉위 후에 역모혐의에 연루되어 고향인 동래로 유배되었다. 정중부의 난이 일어나 의종(1146~1170)이 시해되고, 동래로 귀향 온 지 19년 만에 명종(1170~1197)이 즉위한 뒤에 복권이 된다.
동래 정씨가 고려시대 때 중앙정계에 두각을 나타나게 된 것은 정서의 조부 정목 때부터이다. 33세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고, 아들 3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함으로써 문벌 가문으로 도약을 하게 된다. 정서의 부친인 정항은 종2품 벼슬까지 올랐고, 오랜 기간 임금을 측근에서 모셨다. 정서는 넷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3명의 형들이 모두 어린 나이로 사망하여 장남이나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정서는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부모의 음덕으로 관직에 진출하다. 추후에 인종 임금의 왕비였던 공예태후의 여동생과 결혼을 함으로써 인종의 손아래 동서가 된다. 왕실과 인척관계로 엮이게 되고, 특히 두 번째 왕자였던 대녕후 왕경과 아주 친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인종이 사망하고, 의종이 왕권강화를 목적으로 다른 왕자들을 경계하면서 대녕후 왕경을 추대하려는 역모사건이 생긴다. 정서 또한 종실들과 모여서 밤마다 음주를 한다고 탄핵을 받게 되면서 왕경은 왕자 지위를 박탈당하게 되고, 정서 또한 중앙 정계를 떠나 동래와 거제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의종은 "오늘 일은 조정 의론에 핍박되었으나 가서 있으면 마땅히 소환 하겠다"고 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임금의 부르심은 없었다. 실제 그가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1170년(명종 1)에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즉위한 뒤였다. <악학궤범>에는 이 노래가 ‘삼진작(三眞勺)’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정서의 호가 과정인 이유는 참외를 심고 자연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다고 해서 그렇게 지어진 것 같다. 왕의 부름을 기다렸으나 감감 무소식이자 거문고를 타면서 자신의 심중을 노래로 읊었다고 한다. 후세 사람들이 그가 지은 노래에 작자의 호를 따서 정과정곡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려가요 중 유일하게 작가가 분명하게 밝혀진 노래로써 정서가 소일삼아 참외를 심었던 장소에 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 주제 : 충신연주지사
☆ 기존연구
정서는 이종과는 동서지간이었으며 인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인조에 이어서 자기 이질인 의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종의 아우를 추대하려는 음모에 가담하고 있다는 참소를 입어 1151년에 고향인 동래로 귀향가게 되었다. 의종은 “오늘 일은 조정 의론에 핍박되었으나 가서 있으며 마땅히 소환하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 귀양에서 풀려난 것은 무신란이 일어나 의종이 쫓겨나고 명종이 즉위한 뒤의 일이었다. 소환한다는 명령을 기다리다가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지으니 그 사설이 슬펐다는 말이 <고려사>에 보인다. 이어서 정서가 스스로 호를 과정이라 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그 곡조를 <정과정>이라 이름 지었다고 했다.
<정과정곡>은 열한 줄로 되어있는데 처음 두 줄에서는 님을 그리워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산에 사는 접동새와 비슷하다고 했고 그 다음 두 줄은 자기 죄가 임금이 잘못 알고 있는 바와 다르고 사실은 참소를 당해 허망하다는 것을 남은 달 새벽별이 바로 알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넋이라도 한데 가고 싶다고 하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하며 그런 언약을 어기고 임금이 자기를 버린 것을 원망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과도 허물도 천만 없다 사고 그 모두가 참소하는 무리의 말일 따름이니 슬프다고 했다. 마지막 두 줄에서는 님이 자기를 벌써 잊었는가 묻고 마음을 돌리어 사랑해달라고 간청했다.
<정과정곡>역시 사뇌가의 잔존 형태이며 향찰로 표기되지는 않았다는 점이 문제이기는 하나 오로지 구전으로만 전해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향찰표기가 있었다고 인정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다섯 줄로 볼 수 있으면서도 사뇌가 본래의 격식과는 아주 달라진 데가 있으니 바로 감탄구가 놓인 위치이다. “님이 나를” 하는 말 앞에 와야 할 감탄구가 “아소 님하”에 들어가 있다. 그래서 사뇌가가 해체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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