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문학] 허균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 연구 - 남궁선생전, 홍길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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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작품의
문학사적 의의 연구
: 「남궁선생전」과 「홍길동전」
작품 분석을 중심으로
목 차
Ⅰ. 서 론
Ⅱ. 본 론
1. 허균의 생애
2. 허균의 사상과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
3. 허균의 주요 작품 감상 및 해석
1) 남궁선생전
2) 홍길동전
4. 허균의 작품들의 문학사적 의의
Ⅲ. 결 론
Ⅳ. 참 고 문 헌
Ⅰ. 서 론
허균은 당대 최악의 평가를 받은 문장가이자 사상가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서 문학사적 가치를 확실하게 재평가 받은 자 이기도 하다. 즉, 시대에 따라 정반대의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시대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과 개혁적 사상, 또한 그의 사상이 담긴 작품의 해석을 통해 허균이 이루어낸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밝히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본 연구는 허균이 이루어낸 문학사적 의의를 그의 가장 대표적인 두 작품「남궁선생전」과 「홍길동전」을 중심으로 밝힐 것이다. 첫째, 우선 허균의 생애와 그가 취한 사상 및 행동, 또한 그로 인한 당대의 평가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둘째, 허균의 사상이 녹아있는 그의 대표작 「남궁선생전」과 「홍길동전」에 대해 세세히 감상하고 해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해석을 통해 허균이 이루어낸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고찰할 것이다.
Ⅱ. 본 론
1. 허균의 생애
허균(1569년~1618년)은 선조대에서 광해군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이자 사상가였고, 또한 개혁가였다. 그는 1569년(선조 2)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허엽의 호는 초당(草堂)으로, 오늘날 유명한 강릉 초당두부의 그 초당이다. 이는 허엽의 두 번째 부인인 강릉김씨 김광철의 딸의 집이 강릉에 있던 데서 유래한 것이다. 허균의 이복형 허성은 이조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동복형인 허봉은 유희춘의 문인이며 허균을 가르칠 정도로 학문이 상당히 수준급에 달했던 인물이다. 또한 허균과 동복형제로는 우리에게 여류문인으로 알려진 허난설헌이 있다. 그녀는 일곱 살부터 시를 훌륭하게 지었다고 소문나 여자 신동이라고도 불렸다. 부친 허엽은 동인의 영수였고, 후에 형인 허성은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 뒤 남인을 대표하는 인물로써 활동하였다.
이러한 명문재사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외가가 위치한 강릉에서 탄생했는데, 그 동네에는 예로부터 교산(蛟山)이라고 불리던 조그마한 야산이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후에 자신의 호를 고향에 대한 향수로써 야산의 이름을 따 ‘교산’이라고 짓는다. 그는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누이인 허난설헌과 함께 이달의 문학에서 수학하게 된다. 이달은 당시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조선 중기 삼당시인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한시의 대가였고, 문장이나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신분적 한계로 벼슬은 한리학관에 그친 사람이었다. 후에 「홍길동전」의 주인공을 서자로 설정한 것은 자신의 스승이었던 이달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허균의 관직생활은 1594(선조 27년) 과거 급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여러 벼슬을 거쳐 황해도 도사에 제수되었으나 곧 파직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데리고 와서 살고 청탁을 일삼는다는 이유에서였다. 또한 그는 불교를 숭상한다는 이유로 몇 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허균의 정치적 생애는 1613(광해군 5년)에 일어난 계축옥사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계축옥사란 칠서지옥이라고도 하는데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박치인과 빅치의, 허홍인 등 7명의 서자가 주도한 변란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옥사를 일컫는다. 이들은 일찍이 1608년에 서얼금고의 폐지를 주장하며 소를 올렸으나 주장이 거부되자 전국에 출몰해 화적질을 하였다. 결국 포도청에 잡혀왔는데 대북파의 이이첨 등이 영창대군 추대 음모를 꾸미고는 이들에게 거짓 자복하도록 교사하였다. 이에 따라 결국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제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심각해진 사태에 평소 이들과 깊은 친분을 갖고 있던 허균은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하여 당시 실세이자 같은 글방 동문인 이이첨에게 자신을 의탁하였다. 점차 정권과 밀착하게 된 허균은 결국 무리수를 감행하고 마는데, 바로 대북세력의 전면에 나서 인목대비의 폐비를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인목대비의 폐비 문제는 칠서지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같은 북인세력인 정온을 비롯해 남인계 이원익 등 상당수의 신료들이 반대하였던 사안이었다. 그러나 허균은 인목대비의 죄를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요, 영창대군은 선조의 아들이 아니고 민가(民家) 사람의 아이를 데려다가 기른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인목대비는 폐위되어 서궁에 유폐되었지만, 허균은 이 일로 폐비를 반대하는 상당수 여론으로부터 배격되었다. 또한 1617년 12월 기준격의 비밀 상소와 1618년 허균의 외가 서얼인 현응민의 격문으로 인해 허균은 역모 혐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형 당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호인 교산과도 같이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처럼 자신의 이상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처형되고 만 것이다.
2. 허균의 사상과 그에 대한 당대의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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