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파 김상용 레포트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5.03.29 / 2015.03.29
  • 6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1,0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월파 김상용(月坡 金尙鎔)
1. 작가의 생애와 활동
월파(月坡) 김상용(金尙鎔)은 1902년 경기도 연천에서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누이동생 김오남은 시조시인이다. 부친 김기환은 한의사로서 한약방을 경영하는 한편, 1만여 평의 농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생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이 때문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서 제적되고 낙향한다. 연천에 있는 동안 결혼하고 그 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졸업했다. 그 후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과를 졸업(1927)하고 귀국하여 모교인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는 한편, 이화여전에서 영문학 교수로 근무하기 시작했다.
월파는 1926년 『동아일보』에 시 「일어나거라」를 발표하면서 시작활동을 출발하였고, 그 뒤 「이날도 앉아서 기다려 볼까」,「無常」,「그러나 거문고의 줄은 없고나」등 을 발표하고, 『동아일보』와 잡지『신생』에 투르게네프, E.A.포, 바이런, 테니슨 등의 번역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의 시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34년에 발표한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비롯한 전원시풍의 시를 쓰면서부터였다. 1939년 『문장사』에서 시집『望鄕 『望鄕』에는 전원귀의를 지향하는 시 27편이 실려 있다. 맨 앞에 수록된 작품으로 전원 귀의 의지가 대표적으 로 나타나는 작품으로 「남으로 창을 내겠오」를 들 수 있다. -이건청 「남으로 창을 내겠오」
』을 출간했다.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폐지되자 이화여전을 사직하고 종로에서 장안화원(꽃집)을 2,3년간 경영하기도 했다. 광복 직후 강원도 지사로 임명되었지만 공무원이 체질에 맞지 않다고 여겨 수일 만에 사임했으며 이화여대 교수로 잠시 지내다가 1946년 미국에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했다. 1949년 귀국하여 이화여대에 복직하였으며 1950년, 사회와 현실에 대한 풍자적 시각을 담은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 무하선생방랑기(無何先生放浪記)는 풍자적 경수필이다. 이 수필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소설, 특히 콩트식 구성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생활의 여유에서 비롯되는 은근하고 기지가 넘치는 웃음으로 요약된다. 1948년 보스턴 대학에서 영문학을 연구한 후 귀국하여 광복 후에는 과거의 관조적인 작품 경향에서 벗어나 인생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을 보여주고 있다. -조용란(1991), 「김상용론」,한국비평문학회,비평문학
」를 『수도문화사』에서 간행했으며 이외에도 20여편의 산문집도 간행되었고 평론활동도 하였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이 함락되자 그는 숨어 지내다, 928 수복 이후 공보처 고문을 역임하고 『코리아 타임즈』의 사장을 지내다가 1951년 6월 20일 부산에서 게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는데 그 이후 왕진을 온 의사의 잘못된 투약으로 인해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상에서 보듯 그는 시조, 번역시, 수필, 평론, 번역희곡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발히 활동한 문학인이자 거의 모든 생애를 대학의 강단에서 학문과 창작으로 보낸 사람이다. 잘못되어 가는 사회 현실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적극적인 자세만 취하였더라도 그가 지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반민족행위자로서 친일적인 작품 조선의 징병제 실시를 규정한 병역법 개정이 1943년 8월 1일부터 시행되면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7일까지의 일주일간을‘징병제 실시 감사 결의 선양주간’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결의 선양대회를 벌였다. 이 일환으로 당시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는 8월 1일∼8일에 걸쳐 현역 화가들의 삽화를 겻들인 징병 축하시 「님의 부 르심을 받들고서」를 연재했다. 현역 시인 7명(김팔봉, 김용제, 김상용, 노천명, 김동환, 이하윤 등)이 같은 제목 으로 실었는데, 여기서‘님’은‘일본일왕’을, ‘부르심’은‘징병’인 것이다.
을 쓰기도 했다. 이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그의 교육자로서의, 또는 문인으로서의 인격에 오점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 작품 활동 -김상용론 조용란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月坡김상용 론
  • 月坡 김상용론 1. 작가의 생애월파 김상용(1902~1951)은 1902년 8월 27일 경기도 연천군에서 아버지 경주 김씨 기환과 어머니 나주 정씨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부친은 그 지방의 한의사로서 한약상을 경영하는 한편 일만여평의 농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1908년 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부친의 영향권 아래에서 벗어나게

  • 김상 용의 작품 분석남으로 창을 내겠소 등
  • 작가 소개김상용(金尙鎔 1902-1951) 시인. 호는 월파(月波). 경기도 연천 출생. 일본 릿쿄(立敎) 대학 영문과 졸업. 이화 여자 전문학교 교수. 서정시 무상, 그러나 거문고의 줄은없고나를 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와 창작 생활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는 이 1939년에 출간되었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 ▣ 남으로 창을 내겠소 ▣남(南)으로 창(窓)을 내겠소.밭이 한참 갈이괭이로 파고호미론 풀을 매지요.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

  • [고전시가론] 영남가단 문인 연구
  • 월파촌으로 옮겨 살았다. 광해조 대 다시 합천군수,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인조반정(1623)이 있은 다음 사헌부 지평,성균관 사업 사헌부 장령등을 제수하였으나 중도에서 모두 칭병稱病사양하고, 이괄의 난 때 인조가 공주로 남천南遷했다가 환도還都함에 행재行在로 나아가자 양재역에서 장령을 제수하고,자정전에서 위정의 소견을 물으니,먼저 마음속에 대강령을 정하소서하니 이르기를 대강령이란 무엇인고하여 그것은

  • [사회문제론]호주제폐지의 이유와 방안
  • 김상용 부산대학교 법과대학 교수(호주제도 관련 토론회자료집, 호주제도, 무엇이 문제인가?) 현재의 호적제도는 호주를 중심으로 편제되는 방식으로 되어 있고, 호적을 찾는 데에도 호주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하므로, 호주제도를 폐지하는 경우 현행 호적사무에 큰 혼란이 야기될 뿐만 아니라, 새로운 편제방식을 도입하기 위하여 불필요하게 많은 비용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 호주제도 폐지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 [법학개론] 호주제도의 개선방안과 대처방안
  • 판단하여 주민등록과 일원화된 편제방안으로 해결되었으면 좋겠다.-【참고문헌】-■ 여성신문 (2003. 10. 9)일자 “민법개정안 공청회” 뉴스■ 생활과 법률-(김병묵, 이영후 공저) “제3장 호주와 가족”■ 사례중심의 가족법-(엄영진 저) “제10절 호주와 가족”■ 호적법강의(이론․사례․판례)-(여상철 저)■ “다시 호주제 폐지를 말한다”-(김상용) 법무부주최 토론회자료집, 2000년■ “우리나라 호적제도에 관한 연구”(이거현) ,2001년 2월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