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남북조의 관리선발 구품중정제 구품중정제 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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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의 관리선발
-구품중정제-
구품중정제
양한(兩漢)시대 찰거제(察擧制)는 과거제도의 기초형태로서 서로 비교해보면 찰거의 원시성과 폐단이 크게 드러난다. 찰거제에서 고시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추천이 결정적이었다. 추천권은 황제이하 각급관료들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권문세가의 청탁, 귀족들의 전단, 수뢰공행 등의 폐단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 왕조의 정치가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흥성했던 시기가 지나 몰락할 때 이러한 폐단은 점점 심각해져갔다.
황건적의 난으로 후한정권이 무너지고 중국사회가 군웅할거의 혼란으로 빠져들 때, 조조(曹操)가 두각을 나타나게 된 중요한 요인은 ‘유재시거(惟才是擧)’라는 인재등용정책에 있었다.
건안5년(201) 위왕(魏王) 조조(曹操)는 현명하고 능력있는 자를 찰거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금일 천하가 이직 안정되니 않았다. 이때는 특히 어진 자를 구하는 것이 시급한 시기이다. 만약 반드시 청렴한 선비만을 등용한다면.....”(三國志 魏志, 武帝記)이라 하였다. 이는 후한 이래로 문제(門弟: 즉 집안)나 도덕(道德)에 근거한 인재 등용을 반대하고, 오직 능력 있고 현명한 사람만을 선발하겠다고 제창한 것이다. 즉 조조는 치국용병지술(治國用兵之術)이 있는 자는 신분과 도덕을 떠나 중용하였다. 이러한 능력위주의 관리 선발제도를 체계화한 것이 바로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또는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이다. 이것은 그의 적수였던 사세삼공(四世三公)출신인 원소와 원술 등은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구품중정제를 실시한 동기는 후한시대에 극도로 문란해진 관직등용의 기강을 바로잡고, 무능한 후한의 관리들을 도태시키는 동시에 새 정부의 출범과 함께 지방에 숨어있는 유능한 인재를 추천받아 선발하려는데 있었다. 이를 위해 조비(曹丕)는 진군(陳群)의 건의를 받아들여 구품중정제를 실시하였는데, 구품중정이라는 용어에서 이 제도의 함축적인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구품’이란 한 주(州)와 한 군(郡)내의 인재를 품덕(品德)과 재식(才識)에 근거하여 上上, 上中, 上下, 中上, 中中, 中下, 下上, 下中, 下下와 같이 아홉 개의 등급 서열로 나눈다는 것이고, ‘중정’이란 공평과 공정을 뜻하는 것으로 중앙정부에서 임명한 관리 즉 중정관(中正官)을 말한다. 그리고 이 중정관으로 하여금 지방 인사의 덕행과 재능을 심사하게 하여 9등급으로 분류 판정시켜 관리채용 후보자로서 중앙의 이부로 천거하게 하였다.
지방에 설치한 중정은 대중정(大中正)과 소중정(小中正)으로 나누고, 중정관은 중앙관리가 겸직하였는데 원칙적으로 그 지방 출신자가 임명되었다. 중정으로 하여금 관내의 사관지망자의 덕행과 재능을 심사시켜 일품에서 구품까지 등급 매겨 내신서를 작성하게 하였고, 이에 따라 중앙정부는 관리를 채용함에 있어 지방 중정이 천거한 관리지망생을 대개 향품(鄕品)보다 4등급 낮추어 채용하였다. 이 법은 정실에 좌우되지 않고 개인의 재덕에 의하여 관리를 등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것이며, 구품중정제는 선관제도를 뒤이은 것으로 양한 찰거제 이후 대변혁이었다. 조위정권초기에 이 제도는 호족가문의 명사에 의해 사인에 대한 평의와 품급이 이루어져 중앙에서 위임파견된 전문관리가 수습하였다. 이것은 후한 이래로 호문 명사가 조정하였던 찰거의 국면을 어느 정도 개선하였으며, 조조 이래로 전력을 다해 다스리려는 풍조가 생겨 구품중정제는 당시에는 근본적으로 공정했다.
그러나 후로 갈수록 유력자의 자제는 모두 향품 2품으로 사정되어, 그것이 그 집안의 기득권으로 바뀌었고, 이에 미치지 못한 한사(寒士)와의 사이에 커다란 단절이 발생하였다. 또한 같은 2품 중에서도 상하의 차이가 생겨났으며, 같은 관품 내에서도 상류자가 오르는 청관(淸官)과 하류자가 오르는 탁관(濁官)의 구별이 생겼다. 이에 이부는 귀족의 계보를 외워두고 가격에 따라서 임관시키는 통례를 남기기도 했다.
진(晉)나라 이후에는 중정관을 호문사족(豪門士族)이 독점하게 되었고 인물 평가도 문벌자제(門閥子弟)를 주요 기준으로 삼게 되어, “높은 등급으로 추천 받는 자 가운데는 빈한한 가문 출신이 없고, 낮은 등급으로 추천 받는 자 중에는 권문세가 출신이 없다(上品無寒門, 下品無勢族)”라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당시 가문이나 문벌 등 종족의 권세와 배경을 중요시하는 호족문벌(豪族門閥) 사회체제의 특성을 잘 반영한 것으로, 이 제도가 호족의 관직독점과 귀족화를 촉진시키고 자기 세력을 확대, 공고히 하는 도구로 변질되어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 제도는 남북조시대에 걸쳐 존속하다가 문벌세족이 쇠퇴함에 따라 수(隋)나라 시기에 이르러 폐지되었다.
구품중정제의 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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