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未堂) 서정주론 - 미당 서정주의 시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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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미당(未堂) 서정주론
1. 미당 서정주의 생애와 활동
서정주는 1915년 5월 18일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미당이며, 아호는 궁발이다. 아홉 살 때 줄포란 곳에 이사를 가게 되고, 이곳에서 줄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6년 과정을 5년만에 수료했다. 1929년에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그는 1930년 11월 광주학생사건 때 4인의 주모자 중의 하나가 되어 학교를 퇴학당했으며, 이듬해 고향에 있는 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해서도 역시 주모자가 되어 자퇴를 해야 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시벽」이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했다. 같은 해에 김광균, 김달진, 김동리 등과 동인지『시인부락』을 주재하면서 본격적인 시작 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만 18세 때쯤 영향을 받은 인물은 니체와 보들레르였는데, 보들레르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의 영향도 받았다. 1941년에는 첫 시집『화사집』을 낸다.
두 번째 시집『귀촉도』를 낸 것은 해방 뒤 3년 후인 1948년이다. 그는 이 시집에 일제 말기에 쓴 시들과 해방 뒤에 쓴 시들을 함께 수록했다. 아쉽게도 그는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조선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친일시를 썼다. 1942년 ‘다츠시로 시즈오’라는 창씨명으로 평론을 발표한 이후 11편에 이르는 친일작품을 썼다.
해방 이후에는 박종화, 김광섭, 유치진, 양주동 등의 ‘중앙문화협회’ 멤버들이 중심이 되어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했는데, 미당은 이 단체에서 시분과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았다. 1945년 겨울부터는 다시 시작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1946년 여름부터는 자연과 인생에 대한 새로운 느낌이 열리기 시작했다.「푸르른 날」「골목」「밀어」「국화 옆에서」등의 뛰어난 작품들이 이 시기에 쓰여졌다. 그 후『삼국유사』『삼국사기』속에 담긴 신라의 생활정신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태도가 시로 응집되어 나타난 것이 1960년에 펴낸『신라초』이다. 1968년의 시집『동천』역시 이 신라정신이 밑바탕이 되었다.
1960년 가을 그는 모교인 동국대학 국문과 강사가 되었고, 이 무렵 펴낸 제 3시집『서정주시선』으로 미국의 아세아제단에서 주는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후 1977년 11월 1년 가량의 세계일주를 떠났다. 돌아오고 나서 그는 서양에 대한 환멸감 끝에 민족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면서 3년간 골몰해 시를 썼고, 이를 정리한 것이 1982년에 나온『학이 울고 간 날들의 시』라는 시집이다. 먼 단군 때로부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 조선시대에 걸쳐 내려온 정신과 사람다운 모습, 그런 이야기들의 모음이 이 시집의 내용이다. 그 후 2000년 10월 한평생을 뒷바라지한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술로 연명하다시피 하다가, 2000년 12월 24일 향년 85세로 타계했다.
2. 미당 서정주의 시세계
1) 생명 자체로서의 인간과 원초적 본능
미당이 중심이 되어 1936년 11월에 창간한『시인부락』을 회고하는 데에서도 밝혔듯이『화사집』을 낼 당시 그의 관심사는 생명의 탐구와 이것의 집중적인 표현에 있었다. 이같은 주제 구현의 배경에는 그 이전 한국 시단이 언어의 조탁에 치중하거나 이념적인 경향에 기울어진 것을 타파하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 고, 점점 궁핍화되어 인간의 삶의 조건이 열악해져만 가는 현실 속에서 생명에 대한 인식과 인생을 직시 하고자 하는 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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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당(未堂) 서정주 - 작품 경향과 변모 과정
  • 시집 『신라초』(1960)와 『동천』(1968)이다. 그리고 그는 여러 문인 협회와 단체의 요직에 서고 강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남한 문단의 중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1960년에는 동국대학 국문과 강사가 되었고, 제 3시집 『서정주시선』으로 미국의 아세아 재단에서 주는 ‘자유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후로 미당은 고향 질마재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들을 소재로 한 『질마재 신화』(1975년)를 내고, 1977년과 1984년 2차에 걸쳐 세계일주를 하게 된다. 이 경험

  • 미당未堂서정 주순 수시
  • 세계의 산 이름을 암송하기 시작하여 1990년 9월 산 이름 1,625개를 모두 암송한다. 2000년 10월에 부인이 사망하고 뒤이어 12월 24일 별세한다. 이후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2. 작품의 경향과 변모 과정서정주는 생전에 15권의 시집을 출간하고, 약 70년의 창작 활동기간 동안 1000여 편의 시를 발표한다. 지금까지 해외에 번역된 한국문학 자료 중 가장 많은 나라의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지고 있다. 미당 시문학관 - http://www.seojungj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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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주 徐廷柱 1915 - 시인. 호는 미당(未堂).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출생/ 어린 시절 서당에서 한학(漢學) 수업. 전북 부안군 졸포보통학교 수료.서울 중앙고보 및 전북 고창고보 중퇴.방랑생활. 1931년 고승 박한영 대종사 문하에 입산,서울 개운사 대원암의 중앙 불교 전문강원에 입학, 그 뒤 중안 불교전문학교에서 수업.1936년 신춘문예에 시 벽이 당선되었다. 시동인지 편집 겸 발행인,동인은 김돌이.이용휘.오장환. 등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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