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몽고항쟁기의 저항의식과 삼국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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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고항쟁기의 저항의식과 삼국유사
1. 머리말
삼국유사를 사학사적인 관점에서 다룬 논문은 20편에 달한다. 대부분의 논문들은 삼국사기에 비하여 자주성이 높으며 사료를 원형으로 그대로 전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사서에서 사료를 원형 그대로 전해 주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대단히 고마운 일이지만 사학사적인 입장에서 이를 긍정적적으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이기백의 견해가 나왔다. 이 견해는 정곡을 찌른 평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삼국유사를 지배한 역사관이 신이사관이라 하여 삼국사기의 합리적 역사관에 비하여 복고적인 성격이라는 그의 견해는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에 실린 사료가 모두 삼국사기에 비하여 정확한 것인가도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의 성격에 대하여는 이를 역사서로 보는 견해, 불교사 내지는 불교문화로 보는 견해, 설화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전문 영역의 관심에서 본 것이지만 사학사적인 의미에서는 이를 종합하여 전체 성격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의 체제가 기전체(紀傳體)라는 설과 고승(高僧)전체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러한 견해들을 검토하면서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연구에 아직 미진했던 몇 가지 문제를 보충하고자 한다.
2. 일연의 생애와 삼국유사의 자료수집
1214년(고종 1) 지금의 광주 지방인 해양에 있던 무량사(無量寺)에 가서 학문을 닦았고, 1219년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뒤, 여러 곳의 선문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사선(九山門四選)의 으뜸이 되었다. 1236년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의 포산·남해·윤산 등지에서 전란을 피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1261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로 갔다. 강화도의 선월사(禪月社)에 머무르면서 설법, 지눌의 법을 계승하였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를 베풀었는데, 일연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1277년(충렬왕 3)부터는 충렬왕의 명에 따라 청도 운문사(雲門寺)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이 때에 <삼국유사>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1282년 가을 충렬왕의 간곡한 부름으로 대전에 들어가 선을 설하고 개경의 광명사(廣明寺)에 머무르면서 왕실 상하의 극진한 귀의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라는 호를 받았으며, 이해 4월 왕의 거처인 대내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를 받았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의 봉양이 마음에 걸려 몇 차례에 걸친 왕의 만류를 뿌리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산아래에서 모시고 봉양하던 어머니가 1284년에 죽자, 조정에서는 군위 화산의 인각사(麟角寺)를 수리하고 토지 100여경(頃)을 주어 주재하게 하였다. 1289년 6월에 병이 들자 7월 7일 왕에게 올릴 글을 쓰고, 8일 새벽 선상에 앉아 제자들과 선문답을 나눈 뒤 1289년 84세로 죽었다.
삼국유사에 실린 금석문, 고문서, 설화등은 그가 거주했던 지역 그리고 여행하였던 지역과 관계가 있다. 그가 긴 생애의 태반을 경상북도(40년간 거주)에 머문 것은 삼국유사가 신라를 중심으로 엮어진 배경이었고, 경남지방에 10여년 머문 것은 가야사를 강조한 배경이었다. 강화도와 개경에 머문 것은 단군 조선과 여타 부족 국가를 기술 한 것과 관련이 있다.
3. 삼국유사 집필당시의 사회적 배경 - 몽고항쟁기
몽고군의 고려 침입은 1231년 최초로 시작되었고, 이후 1232년에 2차, 1235~39년에 3차, 1247년에 4차, 1253년에 5차, 1254~59년에 6차의 침입이 있었다. 집정자 최우는 1232년 7월 정권유지와 장기항전을 위해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여섯 차례에 걸친 침입의 사이마다 휴지(休止)기가 없지는 않았지만. 이와같은 장기간에 걸친 전란이 고려와 고려인들에 안겨 주었을 고통과 참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1270년이 되던 해에 문신들이 난을 일으켜 최충현의 무신세력인 4대 최의를 죽여 60년의 최씨 정권은 막을 내렸다. 이 해에 원종은 40년 만에 환도를 개경으로 천도하고 반대하는 무신들을 모두 죽였다. 이 때 항몽(抗蒙)의 움직임에 앞장섰던 삼별초가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몽고에의 굴복을 뜻하는 개경 환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계기로 반발을 하게 된 것이다. 대부분 몽고에 포로로 잡혀갔던 사람으로 구성된 삼별초(야경 순찰)가 1270년 배중손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전남 진도에 주둔하다가 고려와 몽고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그 잔존세력이 탐라로 옮겨가 2년 남짓 버티지만, 그들도 김방경이 이끄는 토벌군에 끝내 패몰되고 말았다. 삼별초가 구축한 독립국을 방불케 하는 체제는 이 때 깨져 버렸다. 삼별초란이 종식됨으로써 고려에서 반몽 세력은 뿌리째 뽑혀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김방경(金方慶)이란 인물을 살펴보면 일찍이 대몽항쟁에 나서 몽고군과 싸웠고, 고려 조정의 상하 관료들과 일반 백성들로부터 신망과 존경을 받아 온 그가 몽고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바로 고려의 자주성을 주장하며 독립된 정권을 세운 삼별초와 대결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역사의 비극이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 조정에는 출륙(出陸)을 반대하며 몽고에의 항전(抗戰)도 불사한다는 일군의 무신 세력과, 일단 강화의 길이 열린 만큼 화평(和平)책도 추구하여야 한다는 문신 세력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기서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은 삼별초란에 대한 다각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것이 고려 무인들의 자주적 도외(挑外)정신을 보여주고 고려가 몽고 간섭 아래 독립왕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준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되지만, 동시에 삼별초란으로 귀결되기까지의 사태진전은 최씨문신정권의 독단적, 위압적, 폐쇄적 정치행태 및 대몽항쟁과 정권의 이해관계와의 연결이 기본적 이유가 된다는 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삼별초란의 실패로 인한 반몽세력의 완전 몰락은 그 후 고려사회의 발전을 제약한 일면이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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