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국과 에도 바쿠후 의 멸망 일본과 서양열강 불평등조약 도쿠가와 체제 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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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개국과
에도 바쿠후(幕府)의 멸망
목차
1. 머리말.
2. 서양열강과 불평등조약.
3. 도쿠가와 체제의 와해.
4. 테러와 타협의 정치.
5. 도쿠가와 체제의 전복.
6. 맺음말.
1. 머리말.
개국 이전의 일본은 섬나라라는 특성상 안으로 철저히 고립된 상태였다. 일본의 정치체제는 천황제와 막부정치로 이루어졌었고, 중앙 조정의 천황은 실권을 잃은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실질적 권력을 쥔 막부는 봉건제 확립의 필요에 의해서 카톨릭 포교, 유럽제국과의 접촉, 해외 무역 등을 엄격히 통제하고 있었다. 이렇게 에도막부의 쇄국정책은 19세기 서양의 각 국들이 산업혁명을 거쳐 산업화를 완성해 가는 도중에도 계속되었으며, 결국 동아시아 진출을 원하던 서구열강은 이런 일본에 대해 개국을 요구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의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는 경제 위기와 더불어 농민과 사무라이의 사회적 불만이라는 이중의 압박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군사적경제적문화적 외세가 국제관계를 요구하게 되었고 도쿠가와 막부의 전통성은 의심받게 되었다. 하지만 1860년대 중반까지 막부는 군대를 개편하고, 다이묘와 쇼군 사이의 권력을 조정하며, 신기술을 도입하는 등 도쿠가와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도쿠가와 통치자들은 구체제에 너무 많은 것을 투자한 격이 되었고, 여러 사회적 동요와 유혈사태 속에서 거대한 정치 드라마를 펼치며 무너졌다. 여기서 우리는 미국의 페리 제독의 출현과 그에 의한 일본의 개항이 일본에 미친 영향을 이해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와 경제가 불안해지게 되고, 막부의 권위가 추락하는 시점에서 일본의 많은 지사들이 존왕양이운동(尊王攘夷運動)의 기치(旗幟)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내세우는 태도나 주장.
를 들고 막부 타도 운동을 벌이는 과정을 설명하고자 한다.
2. 서양열강과 불평등조약.
1780년대 러시아 탐험가들이 시베리아 산림지대를 횡단해 일본의 극동연안에 당도하게 된다. 그것을 기점으로, 이후 연안해역을 탐사했으며, 모피사냥꾼과 상인들은 사할린 북부 섬들과 쿠릴열도 등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러시아 상인들은 1804년에 나가사키에서 막부에 교역 우선권을 요청 했지만 거절당하게 된다. 이 사건은 외세의 침략을 알리는 전주곡이 되어, 이후 수십년 동안 일본은 산발적 폭력적인 침입에 시달리게 된다. 그 예로, 1807년에 러시아의 해군 장교들은 홋카이도, 사할린, 에토로후 등의 섬에 있던 일본 거주지를 파괴했다.
또한, 이로부터 1년 뒤 영국 군함 페이튼호가 1808년 나가사키에 입항해 네덜란드인을 공격하겠다며 위협을 했으며, 1818년에는 영국의 배 한척이 에도 근처의 우라가만에 진입했다. 막부가 그들의 통상요구를 거절하자 이런 사태는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다. 이에, 막부는 1825년에 외국선박의 일본으로의 입항, 상륙의 금지조치를 강화하고, 접근하는 외국선박에게 포격을 가할 것과 상륙하려는 외국인의 살해를 지시하는‘쇄국령(鎖國令)’을 공포했다. 그 결과 1837년, 미국상선 모리슨호가 통상요구를 했을 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이라곤 위협포격이라는 싸늘한 반응뿐이었다.
이 후 몇 년이 지난 1844년, 네덜란드인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거점으로 삼아 왔던 나가사키(長崎)에서 교섭을 제안 했다. 그들은 국왕 빌렘 2세의 정중한 친서를 막부에 전달했다. 그들은 세상이 변하고 있으며, 서양열강이 지구 전역에 퍼뜨리고 있는 무역망과 국제질서에 합류하지 않고서는 안전하게 살아남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아편전쟁(1839~42)에서 영국이 청국(淸國)을 굴복 시킨 것은 일본의 커다란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이런 네덜란드 측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기 충분하였다. 처음엔 도쿠가와 정권의 관리들은 회의적(懷疑的)이었지만 조금씩 변화를 꾀했다. 1842년 7월에는 앞의 법령을 크게 완화시킨 새 법령을 공포, 입항하는 외국 선박에 물과 식량을 대준 다음에 퇴거(退去)를 요구한 것과, 그래도 물러가지 않을 경우 한해서만 포격할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이런 조치는 영국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이런 조치와 함께 국방에 대한 새로운 대책도 마련되었다. 1848년에는 1630년대부터 금지되었던 500석 이상 싣는 큰 배의 건조를 지방영주에게 허가하였다. 그리하여 몇몇 다이묘(大名)인 사쓰마(薩摩)번이나 미도(水戶)번, 히젠(肥前)번 등에서는 네덜란드의 병학서 연구와 총포제조가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 이는 쇄국이라는 기본 입장에 효과적이고 실용적인 대응으로 막부와 번(藩)이 방비를 강화하는 동안 전쟁을 피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막부는 외세의 압력에 여러 방식으로 대응하지만 막부 체제는 약화되게 된다. 왜냐면 최소한 단기적으로는 강경한 쇄국정책에서 한발 물러나 서양의 테크놀로지 일부를 수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850년대에 일본은 구미(歐美)열강의 압력 앞에 마침내 쇄국정책을 버리고 개국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열강의 아시아 침략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이 중국 침략에 열중하고 있었던 틈을 타서 일본의 개국은 미국에 의해 실현되었다. 1853년, 미국의 매슈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가 출현하게 된다. 페리제독은 미국 대통령의 국서를 가지고 군함 4척을 이끌고 우라가(浦賀)에 와서 화친을 요구했다. 국서에는 아메리카와 일본 양국의 무역은 두 나라 모두에게 이익이 되며, 쇄국은 시대에 뒤떨어지는 일이라는 것이 적혀 있었다. 즉, 평화롭게 통상에 응하든지, 아니면 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결과를 맛보든지, 양자택일(兩者擇一)하라는 단호한 메시지였던 것이다. 또한, 페리 제독은 미국 대통령의 서한(書翰)만 막부에 전달하고 자신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기 위해 작은 군함 네 척만 끌고 왔지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내년 봄에는 더 많은 병력을 대동하고 에도에 돌아 올 것이라고 선언한 뒤 일단 중국으로 돌아간다. 다음해 1854년 다시 일본에 온 페리는 군함10척, 대포 250문, 승무원1800명을 데리고 카나가와(神奈川)에 와서 개국을 요청했다. 그렇게 하여 마침내 1854년 3월에‘미일 화친조약(和親條約)’을 체결 하였다. 이 조약은 시모다(下田), 하코다테(函館) 두 항구의 개항과 항해중인 미국인에게 석탄, 식량, 물 등 필요한 물건을 공급해 줄 것과 영사의 주재(主宰), 최혜국대우 등을 규정하였다. 그 뒤 이 조약에 기초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와도 같은 조약을 맺게 되었다.
아편 전쟁의 승리로 영국이 홍콩을 차지하고 상하이를 비롯한 5개의 항구를 개항시키는 등 유럽 열강의 중국 침약이 격화(激化)되는 가운데, 이런 정세가 일본에 전해지자 일본에서는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일본에 부임한 초대 미국 영사 타운센드 해리스는 세계의 대세를 설명하며 제 2차 아편전쟁에서 영국의 중국 침략과 청국의 패배라는 배경을 이용해서 통상 조약의 체결을 독촉하자, 1858년에 미국과‘미일 수호통상조약(修好通商條約)’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은 일본은 카나가와(神奈川), 나가사키(長崎), 니가타(新潟), 효고(兵庫)의 개항과 에도, 오사카의 시장개방을 약속 하였다. 또한 항구에 대한 사법권을 포기 했으며, 막부는 외교와 무역의 경험이 빈약한 이유로 체류외국인에게 영사 재판권(치외법권, 治外法權)과 협정에 제시된 관세율을 정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본한테는 불평등조약(不平等條約)이었으며, 일본에 반(半)식민지적 지위를 부과했다. 결국 정치, 경제면에서 일본은 외국 정부에 합법적으로 종속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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