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과학 해방전후기 인물들의 삶과 생각 김성수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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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전후기 인물들의 삶과 생각 (김성수를 중심으로)
1. 들어가며
해방전후기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 중 하나이다. 이 시기에 살던 인물들은 각각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있었고 그것은 각각의 인물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보고서에서는 실존인물로서의 인촌 김성수와 가상인물로서의 일제치하의 경찰(순사)을 선정하였다. 상기 두 인물의 당시 모습을 픽션(fiction)화하여 재구성하기로 하였다. 방식적인 면에서는 김성수의 경우 ‘회고록’의 방식을 빌리기로 하며 시점은 한국전쟁 직전으로 설정하도록 하겠다.(1955년 사망하였으므로 한국전쟁 직전의 시점이 좋은 시점이라고 판단된다. 1950년 초를 그 시점으로 설정하겠다.) 후자인 경찰의 경우 ‘일기’의 형식을 빌리기로 하겠다. 또한 지금 현대에 살고 있는 ‘나’ 라는 인물이 만약 그 당시에 생활하고 있었다면 과연 ‘나’는 어떠한 처지에서 어떠한 사회를 원했을까를 일기의 방식으로 기술하도록 하겠다.
2. 김성수 회고록
내 인생의 원칙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60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많은 선택과 결정들을 해왔고 이것들은 모두 어떠한 원칙들에 근거한 것이었다고 자부한다. 나는 내 스스로가 민족주의자며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민주주의자이며 또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일평생을 교육과 언론에 바친 것도 이러한 생각들이 그 바탕이 되었으리라……. 혹자들은 내가 민족의 해방을 위해 총과 칼을 들고 나서지 않은 것(특히 급진적인 좌파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독립을 위한 투쟁이며 적극적인 방법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내가 행한 일들은 부르주아적인 발로에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을 가지고 왈가왈부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해왔던 일들은 민족주의적인 바탕에서 나온 것임을 확신한다. 이를 가리켜 나는 ‘문화민족주의’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가 ‘문화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교육활동의 시작 - 중앙학교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은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예컨대 대한제국시절 고종황제는 나라의 장래를 위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교육에 관한 칙령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노래가 사람들 사이에 불려지기도 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교육을 크게 강조했고 이것은 장래 민족의 독립이 교육을 통해서 그 초석이 마련돼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지배가 시작되면서 공개적으로 정치활동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지게 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움직임 보다는 교육사업을 통해서 민족의 실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이다. 나의 아버지는 1908년 영신학교를 설립한 바 있으며 나 또한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사립학교의 설립을 계획하던 1914년 당시에 국내에 존재하던 사학들은 일본의 통제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정체상태에 있었으며 오히려 위축되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의 교육을 통제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고 특히 보호령 기간 중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조선을 합병하고 나서 일본은 일본어를 이해하고 그래서 일본인을 위해 심부름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초등교육과 직업교육을 강조하는 정책을 펼쳤고 엘리트 교육을 금지시켰다.
나는 이러한 일제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생각하고 있던 중 송진우를 만났다. 그는 내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나를 매우 질책하였다. 그는 일제의 반조선 교육정책이 민족차별적이라고 주장했고 나 또한 동의했다. 1915년 봄에 나는 백산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나 총독부의 학무국장인 세키야는 이 학교 설립을 승인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학교를 세우려는 계획이 총독부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소문이 퍼졌는지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몇몇 학교들이 도움을 요청해왔다. 그런데 중앙학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학교의 운영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 중앙학회는 지역적으로 존재하던 여러 학회들이 합병된 학회였는데 민족적 위기를 맞은 백성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교육을 강화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정치활동이 불가능했던 탓에 학술과 교육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된 가운데 만들어진 단체였다. 특히나 중앙학회로 합병되기 전의 호남학회는 그 창립자 중의 한 사람이 나의 장인이고 나의 친아버지는 호남학회가 발간하는 공식간행물의 재정을 지원했었기 때문에 나는 중앙학회, 중앙학교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중앙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로 했다. 이때 내 나이가 스물넷이었다. 나는 자존심과 명예에 연연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그랬다면 학교인수와 운영과정, 그리고 다른 일들에서 빚어지는 총독부 관료들의 모욕과 무례를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내 부모님께 감사드린다. 나는 학교에서 우리말을 가르치도록 했으며 이것은 민족주의를 진작시키는 중요한 방책이었다.(일본이 수업시간에 우리말 사용을 금지했던 1939년까지 개설되었다.) 중앙학교는 단순히 교육기관으로서의 활동 이외에 31운동을 준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하지만 참가자들이 종교단체가 주된 주체로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표자 명단에서는 빠졌다. 아마도 핵심 구성원들이 모두 빠지면 지속적 운동이 불가능 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실제로 안창호 선생이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가 폐교된 바가 있다.) 이후에 우리 학생들은 순종황제의 국장일에 독립만세를 외친 이른바 610 만세사건을 주도하기도 하는 등 중앙학교는 민족주의의 산실이 되어갔다.
우리의 언론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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