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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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 1884/86
쁘띠 부르주아의 낙원에서는 모든 것이 낯설다
이 작품은 새로운 기법의 창안을 보여준다. 바로 점묘법(pointillism)이다. 쇠라는 그의 선배 작가들이 했던 것처럼 팔레트에 안료를 섞는 대신, 본래의 색을 직접 캔버스 위에 점으로 덧입혔다. 오직 관찰자의 망막을 투과할 때에만 이 점들이 뒤섞여 의도하는 색조가 나타난다. 그리고 관찰자가 몇 피트 떨어져 관찰할 때에만 이러한 색의 혼합은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크(Ernst Bloch)는 이 그림을 “지루함의 모자이크”라고 평했다. 1977년에 죽은 마르크스에게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La Grande Jatte, 이하 그랑자트)》는 “일요일의 비참함” 혹은 “덧칠해진 자살의 풍경화”였다.
반면에, 미술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eneon)에게 이 작품은 매우 활기찬 이미지로 다가왔다: “무더운(dog-day) 어느 여름 오후 4시의 하늘 아래, 해안선을 따라 돛단배가 떠다니는 이 섬에는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만끽하는 사람들에 의해 생기가 넘쳐난다.”
1884년에서 1886년 사이에 제작된 《그랑자트》에 대해 페네옹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쇠라와 그의 “실재(reality)롤 조합하는 새로운 방식"─즉 무수히 많은 작은 빛의 점들의 흩뿌림─을 극찬하였다. 이로 인해 이 그림은 점묘법(pointillism)이라는 새로운 방식의 창안으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러한 비평가의 열광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 그림은 1891년 작가의 이른 죽음 때까지 작가의 수중에 남겨져 있었다. 화가 폴 시냐크(Paul Signac)는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쇠라가 죽고 난후 그의 큰 캔버스들이 어떻게 될지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그의 모친이다. 그녀는 미술관에 이 그림들을 유언으로 증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지금 도대체 어느 박물관에서 그 그림들을 받으려고 할까?”
쇠라가 죽은 지 9년이 되던 해, 그의 가족들의 요청에 따란 시냐크와 그의 동료들은 쇠라의 작품 전시회를 열었다. 그의 그림은 액자에 끼우지 않은 것은 10프랑, 액자에 끼운 것은 100프랑의 가격이 매겨졌다. 《그랑자트》는 800 프랑의 가격에 파리 중상류층에 속한 어떤 이에게 팔렸다. 19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Metropolitan Museum)은 이 그림을 구매하려 했으나 위원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면 부자인 프레데릭 클레이 바틀렛(Frederic Clay Bartlett)의 경우에는 파리에서 이 그림을 20,000프랑에 사들임으로써 그의 담력과 예술적 안목을 드러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이 그림을 시카고 미술관(the Art Institute of Chicago)에 기증하였는데, 여기서 이 그림은 유럽 모더니즘(European Modernism)을 대표하는 핵심 작품으로 소장되었다. 1931년 프랑스 협회(consortium)는 이 그림을 400,000달러에 다시 사들이려 하였지만, 이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207×308cm 크기의 캔버스는 25살 미술가의 작업실에 딱 맞게 들어간다. 그의 동료는 그에 대해 “그의 수줍음만큼이나 강력한 에너지를 지닌 극도로 완고한 사람”이라고 평했다. 1859년에 태어난 쇠라는 예술적인 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던 그의 아버지는 부동산 투기를 통해 큰 이득을 얻은 법정 공무원이었다.
21살이 되던 해 쇠라는 에꼴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국립미술학교
를 그만뒀다. 그는 역사 회화 뿐 아니라 인어나 요정에 대해서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전형적인 미술가들이 경력을 쌓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1879년 네 번째로 열린 인상주의학파 전시회에서 “예상치 못하고 근본적인 충격”을 경험한 후 그는 홀로 작업하였는데, 가늘고 검은 콩테-크레용(conte-crayon)으로 초상화나 일반인의 모습을 그리거나 작은 크기의 풍경화를 그렸다.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열린 공간(en plein air) 이는 프랑스식 표현으로서 영어로 표현하면 “in the open air”가 된다. 이 표현은 특히 야외풍경을 그리는 행위를 할 때 주로 사용된다. (출처: WIKIPEDIA 웹페이지: http://en.wikipedia.org/wiki/En_plein_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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