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과 직업윤리 호락논쟁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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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유학과 직업윤리>
호락논쟁의 의의
1. 서론
조선의 기반 세계관이던 성리학이 그 상황에 맞게 재해석된 시기는 양자 호란을 겪고 난 후이다. 오랑캐에게 치욕을 당한 조선은 그 위상과 내부에 있어서 외교적, 군사적 등 다양한 면에 있어서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의 학계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 ‘호락논쟁’이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이전의 성리학이나 주자학 체계로는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는 데 미흡하다고 생각되는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 인물성동이에 관한 ‘호락논쟁’은 한없이 추락했던 도덕의식 함양과 인간의 주체성을 세우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유교적 도덕의식의 강조·회복을 통해 당시 사회체제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양반지배층의 계급적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다.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어 근 200여 년간 지속 되며 그 기간 동안 유명하고 재주 있던 학자들의 대부분이 한마디 정도 했을 정도로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로 진행된 이런 학계의 논쟁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이제 단순한 논쟁이 아니었던 이 논쟁에 대해 깊이 들어가 볼까 한다. ‘호락논쟁’, 특히 ‘인물성동이 논쟁’, ‘미발심체유선악 논쟁’, ‘성범심동이 논쟁’을 중심으로 호론과 낙론의 견해를 비교분석한 후, 조선 후기 사회사상사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써 볼 것이다. 이는 조선의 기본 인식이었던 성리학의 이론 세계의 특성을 알게 되는 것 뿐 아니라 그 당시 사회 상황과 조선 선비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2. 본론
1) 논쟁의 발단
인물성이론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을 주장한 이간(李柬)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한 것이 이른바 ‘호락논쟁’이다.
한원진은 1705년에 지은 (시동지성)에서 인물성론에 관해 이미 정리된 입장을 밝히고 있고 이간은 1709년 최성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오상과 미발에 관한 논의를 한 바 있다. 즉 1712년에 논쟁을 벌이기 전에 이미 이들은 자기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론은 외암 이간(1712)이 스승인 수암 권상하에게 아직 발현되지 않은 상태의 마음이 순선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는데 처음에 수암은 외암의 설에 수긍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미발 때 선악이 있다고 하는 남당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남당이 찾아와서 자기의 의견을 자세히 설명하자 수암은 이번에는 남당의 설을 인정하였다. 즉 사람이 태어나면서 기질지성을 가지게 되니 이것은 선악의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미발시 항상 악한 마음만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렇게 되자 수암은 이전의 외암의 설이 옳은 것이 아니고 남당의 설이 옳다고 하면서 율곡의 이통기국의 해설까지 덧붙여 숙종 38년(1712) 외암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다. 그러자 외암은 그의 스승 수암 권상하에게 편지를 보내 스승과 남당의 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 하였고 이통기국에 대해서도 서로 의견을 달리하게 되면서 그들의 논쟁은 본격화되었다. 남당은 외암이 스승 권상하에게 보낸 편지를 보고 스승을 대변해서 외암의 설을 반박하였고, 여기에 외암이 직접 남당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논쟁은 더욱 가열화 되었다. 여기에 대하여 남당도 외암의 설을 직접 반발하고 나섰다. 그리고 그들의 이론적 논쟁은 개인적 논쟁으로 끝나지 않았고, 집단적 논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논쟁은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서 나와 서울지방의 학자들에게 파급되었다. 권상하의 제자들 사이에서 금수오상의 문제와 미발기질의 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다. 그 중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 견해차가 컸다. 결국 두 사람은 권상하에게 시비를 가려줄 것을 청했고, 권상하는 한원진의 학설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후에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권상하의 제자 외에도 서울지방의 학자들도 논쟁에 가담해 ‘호락논쟁’으로 전개되었다. 권상하·한원진·윤봉구 등의 학설을 지지한 이들은 충청도에 살았고, 이간의 학설을 지지한 이들은 대부분 경기 지역에 살았다. 그래서 그들이 거주한 지역을 명칭으로 삼은 ‘호락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2)호락논쟁의 전개과정
(1)인물성동이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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