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정화 의 결집으로서의 근대 과학기술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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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인류 문화 정화(精華)의 결집으로서의 근대 과학기술구조
- 「중국 전통과학은 왜 근대과학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는가」 -
1. 사회화의 지름길 : 패러다임 기능
기존의 틀이 비록 조잡하다고 해도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유사한 것을 만드는 일은 비교적 수월하다. 근대과학구조 역시 원시과학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형성된 것으로 원시과학구조가 근대과학구조의 수립에 패러다임 기능을 하였다고 표현할 수 있다. 과학의 발전에 끼친 패러다임의 영향에 대해서 쿤(Thomas Kuhn:1922~1996)은 “과학의 발전이 바로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하는 매우 주목할 만한 견해를 제기했다. 쿤은 패러다임을 일종의 문제 처리 모델, 과학공동체에서 함께 준수해야 할 준칙, 그리고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해 과학자들의 연구에 시범 기능을 하는 것의 세 가지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보았다. 이 중 특히 세 번째 것은 원시과학구조가 광범위한 구조상의 패러다임의 기능의 일부로서 근대과학구조의 ‘틀’ 노릇을 한 것에 적용시킬 수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과 기하광학은 원시과학구조 패러다임 기능의 대표적인 예이다. 근대 역학과 천문학의 기초를 확립한 원추곡선 연구, 아르키메데스의 정역학(靜力學) 이론, 지렛대 원리와 부력 정리,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문학 이론 등은 모두 유클리드 기하학을 연장시킨 것 혹은 체계적으로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유클리드가 제시한 빛이 직선을 타고 전파된다는 견해, 헤론의 “빛의 반사선은 가장 짧은 선을 지난다”는 주장, 프톨레마이오스가 발견한 오목렌즈의 수학 법칙과 입사각(入射角)과 절사각(折射角)의 정비례 사실 등은 현대 기하광학의 결론과 완전히 일치한다.
원시과학구조의 패러다임 기능이 갖는 중요성을 보여주는 것이 중국의 천문학자 장형의 ‘여지심설(與地心說)’과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地球中心說)이다. 둘은 모두 지구를 중심으로 그 주위를 일월오성 등의 모든 천체가 돌고 있다고 보는 견해라는 점에서 상당히 유사하다. 그러나 장형의 우주관에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과 같은 명확한 이론적 설명이 결여되어 있으며, 중국의 천문학자들은 장형의 이론에서 더 이상의 진보를 꾀하지도 않았다. 이는 중국 천문학자들의 주된 관심사가 행성 운동의 대수적 특징을 적출해 내는 데 있었던 반면, 고대그리스의 과학 지식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기본적인 이론구조를 형성하고 있고, 측량기구와 방법이 수공실험 구조로 구성되어 있으며, 항해 등 대지에 대한 측량이 그에 상응하는 기술 활동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이 세 가지는 비록 한정된 범위이긴 하지만 이론·실험·기술이라고 하는 근대과학구조와 완전히 일치하는 체계를 이루고 있다.
측량의 정확도와 기술만을 가지고 본다면, 중국의 천문학자들도 지구의 크기를 얼마든지 계산해 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구 형태에 대한 이론구조적 결합을 하지 못하였고 이와 같은 원시과학구조의 패러다임 기능의 결여는 중국 전통과학의 발전이 가속화되는 것을 막았다.
물론 고대 중국의 과학기술에도 패러다임 기능이 존재했다. 어떤 종류의 패러다임인가 하는 차이가 있을 뿐, 과학의 발전에서 패러다임 그 자체가 전혀 없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천문학과 대수학이 결합된 전통, 이론의 기술화 경향 그 자체도 패러다임 기능의 하나다. 그리고 유가의 사유 방식인 직관과 합리적 추론 및 윤리중심주의 역시 줄곧 강력하게 작용했던 패러다임의 일종이다.
2. 패러다임 기능의 한계 : 원시과학구조 사회화의 장애
원시과학구조를 포함하는 고대과학의 패러다임이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막강한 기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원시과학구조가 비록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는 했지만 그 겉을 두껍게 에워싼 전문성으로 인해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식별할 수 있었고, 사회화는 각종의 장애물로 둘러싸여 있었다.
과학구조의 사회화를 가로막는 첫 번째 장애물은 과학 자체의 전문성과 복잡성이었다. 기술이 복잡하고 전문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적 요구에 상응해서 존재했고 사회했던 것과 달리, 고대사회에서 과학 특히 순수 과학에 대한 요구는 현저하게 적었다. 고대중국인들에게는 과학이 ‘도룡지술(屠龍之術)’이라고 비유된 것처럼 매우 복잡하나 별로 쓸모가 없는 것으로 여겨졌고, 원시과학구조의 패러다임 기능으로 이루어졌던 고대그리스의 과학적 성취 역시 비과학성과 미신의 풍조라는 고대사회의 일반성을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했었다.
두 번째 장애물은 과학적 결론과 상충되는 직관인데, 과학구조의 성장은 반드시 고대사회의 문화적 배경(사회구조)과 충돌했다. 고대그리스에서 대지가 평평하다는 일반인의 직관 인상, 고대중국에서 직관적 방법에 더 부합했던 개천설(蓋天說)의 성행은 고대사회에서 직관이 과학보다 막강한 힘을 가졌었음을 증명해 준다. 과학은 왕왕 직관과 모순될 뿐만 아니라 종교·가치·의식 구조와도 상충되는 경우가 많다. 수학자가 무당이나 이교도와 대동소이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으며, 교황청 역시 과학자들을 “과학으로써 생명의 원천을 기만한다”는 명목으로 책망하곤 했다. 이처럼 사회의 보편적 관념이 과학이 상충되었을 때 과학구조의 성장은 가로막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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