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민주화시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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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광주민주화시민항쟁
새벽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아침이면 그치겠지 했는데, 양재천은 더 불어나서 힘찬 물살을 더해간다. 광주까지 가야 하는데 빗기이라 위험할까봐 기차를 탈 까도 했지만 같이 가기로 한 경준이가 괜찮다며 차를 끌고 왔다.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오랜만이기도 하거니와 도로 곁의 산들이 푸르름에 물을 머금어 청초한 모습을 자아내어 내 기분도 들뜨기 시작했다.
풍경의 감상도 한 시간을 넘기니 나도 모르게 하품이 나온다. 옆에선 열심히 운전하고 있으니 졸 수 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산들과의 대화는 잠시 뒤로 접고 광주로 가는 목적인 5.18 민주시민운동에 대해 알아본 것 들을 살펴보았다.
요즈음 우리 사회는 민주화 운동의 주역이었던 386세대들의 발언권이 강해지며 한때 언론에서는 386세대, 민주화 세력이란 용어들이 사용되어왔다. 그러나 난 과연
이들이 무슨 일들을 했기에 민주화 세력이라 하는 것인지. 우리 나라에서의 민주화는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알지 못 했다. 과연 그 사람들은 어떠한 생각을 갖은 사람들인?,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가 ? 그 질문에 대한 고민을 위해서 나는 5.18 민주화 민중 운동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한 것이다.
유신체제의 폭압정치에 눌려왔던 국민들은 1970년대 후반부터 민주화운동에 적극 나섰으며, 특히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죽은 뒤에는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12.12사태로 권력을 잡은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국민이 원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저버리고야 말았다. 1980년 봄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시위가 계속되었으며, 신군부 세력은 이에 맞서 5.17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광주에서는 비상계엄확대 소식을 듣고 18일 아침에 전남대 교문 앞에 대학생 200여명이 모였는데, 공수부대가 과잉 진압을 하여 부상자가 많이 발생한다. 그러자 학생들은 광주 도심지로 옮겨 시위를 벌였고, 공수부대는 곤봉과 대검으로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살상했다. 19일에는 계엄군의 만행에 분노한 광주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동참하여 5.18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다.
5월 20일, 광주 시민들은 20만 명 이상 모여 시위대를 형성해서 시청을 접수하고, 차량시위를 벌이며 광주문화방송국을 태우는 등(편파방송 때문)시위가 격해졌다. 21일에는 계엄군의 발포에 대항하려고 예비군 부대 무기고에서 총을 꺼내 무장을 함으로써 시위는 시가전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일부 시민들은 차를 몰고 광주 외곽지역으로 가서 광주의 진상을 전했다. 시민들의 저항으로 21일에 계엄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민군은 이 날 오후에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광주 시민들은 외부와 고립된 채 스스로 치안과 방위를 담당했고, 투사회보를 발행하여 선전활동을 하며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계엄 해제, 학살 책임자 처단 등을 요구했다. 이 자치 기간 동안 광주에서는 단 한 건의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한편, 사태 수습을 둘러싸고 시민군 지도층 내부의 의견이 엇갈리기도 했다.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무기를 회수하고 정부와 타협하자는 쪽과 정부의 퇴진, 계엄령 해제, 구속인사석방, 언론조작 중지 등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결사 항전하자는 쪽으로 나뉘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군부는 광주의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주도하는 난동으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처했다. 그리고 광주지역의 통신과 교통을 단절하여 외부와 격리시켰다.
21일부터 계엄군은 광주 시민에게 무자비하게 발포하고, 광주 외곽으로 나가는 도로를 점령하고 이 곳을 지나는 양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일시 외곽으로 빠졌던 계엄군은 26일부터 대대적인 진압 작전에 나서 광주 시내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27일 새벽에 상황실에서 끝까지 싸우던 시민군 대부분을 사살하고 도청을 접수하면서 열흘간의 민주화운동은 막을 내렸다. 5.18 민주화운동으로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는데,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166명이 사망하고 47명이 행방불명되었고, 28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또 627명이 구속되었는데, 175명이 군사재판에 기소되어 5명이 사형, 7명이 무기징역형의 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1981년 4월에 특별사면 및 감형으로 모두 풀려났다.
사전 조사했던 대략적인 내용을 이다. 이러한 자료들을 다보고도 시간이 남을 만큼 광주는 참 먼 곳이었다. 누가 우리나라가 좁다 했는가. 광주역 광장에 도착한 우리는 이미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음료수를 하나씩 뽑아 들고 바로 옆에 있던 관광안내소로 들어갔다. 5.18 당시 사건의 현장들을 중심으로 돌아보기로 했다. 당일로 다녀야하는 일정이었으므로 바쁘게 움직여야 했지만 이 친구와 나의 특유의 여유로움 때문인지 서두르는 기색은 전혀 보여지지 않았다. 먼 길 왔으므로 볼 수 있는 건 다 보고 가자고 서로 이야기했다. 바로 옆에 관광안내소로 들어갔다. 민주화운동의 도시답게 5.18 시민 민주화 운동의 사건 전개 별로 세워진 기념비를 중심으로 그려진 지도가 있다. 우리는 차로 다닐 수 있는 대략적인 답사 순서를 기도를 보며 약간의 수정을 거친 후 돌아보기 시작했다.
광주역 광장은 계엄군의 발표로 사망한 2명이 최초로 발견된 장소이다. 항쟁이 시작되고 여러 차례에 의한 충돌은 있었으나 사망자가 나온 것 은 최초였다. 이 사건은 광주 시민 전체가 하나 가되어 항쟁에 참여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지금 은 현대화된 역사에 보도 블럭이 깔려있고 많은 차들이 오고 가는 분주한 역사다. 이 곳 어디에 사체가 있었을지 짐작할 수도 없다. 이 곳에서 사체를 발견했던 시민은 어떠했을까 ? 내 곁에서 나와 같이 소리치며 저항하던 친구가 총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에게는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 지금 그 당시의 이 곳은 전쟁터와 같은 지옥이라 생각했을 것 이다. 어찌 분노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욱 소리를 높이며 계엄군에게로 뛰어갔을지 모른다. 그들이 악마처럼 보였겠지. 분명 복받치는 증오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런 투쟁을 하고 있는지 잠시 망각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전쟁으로 다가왔을 테니까. 계엄군은 악마같은 적으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그 당시도 이렇게 추적추적 비가 내렸는지 모른다. 죽어가는 이들을 바라보는 친구들의 눈물이 광주역 광장을 적시었을 것이다.
이 곳에 와서 수정되었던 경로가 바로 지금 가고 있는 국립 5.18 민주 묘지이다. 이 답사의 시작을 위해서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와 민주를 위해 피를 흘리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그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하는 것이 도리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근현대사 수업을 들으며 내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바로 이 곳을 향하게 한 것이다. 그 전까지는 그저 그 사건의 총체적 지식을 얻기위한 공부뿐이었다. 단지 사실만을 좇아 이차원적인 사고의 저변을 넓히려고만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당시, 그 현장에 있었던 인물들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는 사고의 공간이 생겼다. 내가 가장 크게 얻고 보람되게 생각하는 부분이다. 예전같으면 묘지를 굳이 찾아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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