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사] 콘스탄티노플, 니케아 종교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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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제2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A.D 553. ⅡConstantinople)
2. 제 3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AD 680. Ⅲ Constantinople)
3. 제 2차 니케아 회의 (AD 787. Ⅵ Constantinople)
Ⅲ. 나가는 말
참고 문헌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일반인들에게 교회회의, 혹은 종교회의는 감정이 결여된 냉혹한 모임인 듯 느껴진다. 그 결과 우리들은 “단순한 예수, 영적인 천재, 마음이 한없이 너그러웠던 유대인 노동자, 떨어지는 참새와 시드는 들풀들의 예수님”에 대한 낭만적인(!) 생각을 가지는지도 모른다.
제국교회 시대에 황제들이 목회자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신앙고백적인 기술을 요구하였을 때, 교회는 신-인(God-man)에 관하여 말하기 시작하였다. 45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칼케돈에서 소집했던 종교회의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시며, 진정한 하나님이시자 진정한 인간이시며 … 혼란이나 변화나 분열이나 분리가 없는 두 본질로서 … 한데 모여 한 위격을 형성하셨다 … ”고 고백하였다.

1. 제2차 콘스탄티노플 회의 (A.D 553. ⅡConstantinople)


1) 회의 소집 원인
칼케돈 회의에서 교리논쟁이 일단락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칼케돈 신조에 대하여 반대하는 사람들 이들은 신성과 인성이 예수 속에서 한 위격을 이루었음을 부인하고, 그는 신성과 인성으로 더 이상 구별되지 않는 하나의 성질만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단성론자(Monophysite)들은 결국 이 때문에 동방 정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가게 된다.
브루스 셀리 (박희석 역),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서울: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1993), 152.
이 팔레스틴과 애굽에 있었다.
이 무렵 ‘유스티니아누스(AD 527-565)’ 항상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자라고 간주하였고 제국은 이 땅위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시키는 수단이요,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경건한 황제의 사명을 “기독교 신앙을 순수하게 보존하고 일체의 무질서로부터 거룩한 보편적 사도교회를 보호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브루스 셀리, 위의 책, 193.
황제가 처음에는 칼케돈 신조를 옹호하고 그를 반대하는 세력을 핍박하였다. 그런데 황후가 반대파를 선대하므로 황제의 입장이 난처했다. 그래서 황제는 양 파를 화해시키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 일이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서 소위 ‘3장령’이 등장하게 된다. 이 3장령이란 안디옥 파에서 존경을 받던 세 신학자에 의해 이루어진 칼케돈 신조에 반대되는 주장이다.
그 세 신학자란,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한 몸수에스타의 데오도어, 시릴의 반대파였던 데오도렛, 그리고 네스토리안 입장으로 그리스도는 신도 인간도 아닌 단지 구세주일 뿐이라는 주장을 내세운 에뎃사의 이바를 말한다.
참고문헌
1. 정수영, 「신약교회사관에 의한 새 교회사 Ⅰ」 (도서출판 규장)
2. 임도건, 「초대 중세 교회의 역사와 신학」 (기독교문서선교회)
3. 브루스 셀리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박희석 역.
4. 심창섭․ 박상봉 「교회사 가이드」 (아가페 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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