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일제의 대한침략기(1876~1904)에 `친일`의 논리와 실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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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에 대한 친일 여부 판단+

+근대화의 모델 문제와 '친일'개화파+

+삼국공영론(三國共榮論)의 논리적 전환+

+일제의 동화주의적 식민정책과 친일파 육성+

+친일파의 친일논리와 친일활동+

본문내용
많은 글이나 사람들은 '친일파'의 유래를 갑신정변 단계의 개화파에서부터 끌어온다. 갑신정변 주체인 김옥균 등의 변법개화파가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정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의견과 결론이 옳은지 여부에 대해 판단해보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친일파'란 용어는 '외세와의 친연성을 가지는 정치집단'이라는 의미라기보다 민족적 정서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 행위를 한 매국노, 민족반역자와 같은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모든 사회적 언어는 그 개념의 형성 이면에 반드시 역사적 과정을 거친다. 현재의 '친일파' 개념 역시 가혹했던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언어가 역사성을 가진다면 역사적으로 '친일=반민족적'이라는 등식이 그대로 성립되지 않는 시기의 '친일'에까지 이 '친일파'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탈역사적 사고이다. 19세기말의 우리나라에서도 친일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친미파, 친청파, 친러파 등이 함께 존재했고 이들 정치세력의 배후에는 반드시 열강의 힘이 끼어들어 있었다.
자주적 근대화를 불가능하게 만든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속에서 관료를 비롯한 정치세력들은 열강의 힘에 기대어 정치권력을 유지하거나 근대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친일' 성향의 집단 역시 그같은 세력의 일부였다. 그러므로 식민지화 이전의 시기에 친일파를 반민족적 집단으로 매도하려면 친미파 등도 마찬가지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지금도 정서적으로, 정치적으로 친미, 친일로 기울어져 있는 관료나 국회의원들을 우리는 일상적으로 보지만 그들을 바로 민족반역자로 연결시키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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