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탈춤의 전개양상과 그 발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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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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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며
1. 탈춤의 형성배경
2. 탈춤의 기원
1) 산대희설
2) 풍농굿발생설
3. 탈춤의 전개양상
1) 무당굿놀이의 뒷전 - 무당의 연극
2) 꼭두각시놀음과 발탈 - 직업적인 놀이패(사당패)의 연극
3) 탈춤 - 다양한 주체(농민·사당패·도시민)들의 연극
4. 조선후기 탈춤의 구성요소
5. 조선후기 탈춤의 내용
Ⅲ. 나가며
- 본문내용
-
1) 산대희설
조선전기에는 신라 때 이래의 방침과 고려 때의 전례를 이어서 국가적인 행사로 나례희와 산대희가 거행되었다. 나례희는 재앙을 가져오는 잡귀를 몰아내는 굿이고, 산대희는 높다란 다락을 세우고 거기다 오색 비단을 걸치는 등의 장식을 해서 그 앞에서 놀이를 하는 것인데 이후 구나부 이후의 잡희부가 더 중요시되면서 나례희를 바로 산대희라고 하게 되었다.
탈춤 등의 유희를 전문적으로 하는 자들은 천민이었기 때문에 비록 그들이 궁중의 광대로 선발되어 일시적으로 궁에서 활동하였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 신분은 낮았다. 인조 때는 나례의 규모가 축소되고 영·정조 이후에는 산대나례가 소멸되어 공의로써의 탈춤이 폐지된다. 그러자 궁중의 광대들은 향촌광대나 유랑광대로 합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기예를 다듬어 흥행에 주력하였고 놀이패의 유지비는 지방 유지들의 기부에 의존하였다. 이처럼 조선후기 궁중광대와 지방 이속들의 결탁뿐만 아니라 향촌 광대와 이속들의 결탁과 협조로 탈놀이가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것이 산대희설이다.
그러나 이 의견은 상층 계층에서 주도하던 산대희가 대표적인 민중문화 즉 하층문화인 탈춤이 되었다는 것은 침강문화설, 즉 문화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에 논리적이지 않다는 견해가 많이 제기된다. 고대에는 국중대회의 일환으로 거행되던 연극이 아주 존중되었다고 추정되나 중세적인 지배체제가 성립된 후 오랜 기간 동안 상층문화는 연극을 배제했다. 따라서 민간전승인 민속극은 하층문화로 이어졌다. 나라에서 거행한 산대희 또는 나례희 같은 종합적인 연희가 있어 가무잡희를 두루 포괄했어도 그 구실이 태평성대의 번영을 경축하고 장식하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사회적인 갈등을 그리는 민속극은 끼어들기 힘들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그런데도 서울 근교의 탈춤을 산대놀이라고 부른 것은 지난날에 산대희에 동원되던 놀이패의 전통을 이었다고 자부한데서 나온 듯하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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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박문용, 「조선후기 탈춤의 생성 배경과 예능적 특성 연구」, 2002, 교육논총
· 단행본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제 3판 3권』, 1984, 지식산업사
· 누리집
http://cafe.daum.net/04nuri/7pf3/51?docid=1DWde|7pf3|51|20080729080433&q=%C5%BB%C3%E3%C0%C7%20%B1%E2%BF%F8&srchid=CCB1DWde|7pf3|51|20080729080433
http://www.sogang.ac.kr/%7Etalworld/dance3-c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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