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답사] 강화도를 다녀와서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06.12.27 / 2019.12.24
  • 16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97)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6,5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목차
1. 개관
2. 강화도의 역사
3. 가는편
4. 특산품
5. 답사지
1) 보문사
2) 갑곶진
3) 선원사지
4) 광성보
5) 초지진
6) 전등사
7) 이건창 생가
8) 마니산 참성단
9) 부근리 고인돌
10) 연무당
11) 고려궁지
12) 외규장각
13) 용흥궁
14) 덕포진
15) 갑곶 돈대
16) 강화읍성
17) 고려궁터
18) 정수사
본문내용
강화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는 구석기 시대부터 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직접적인 선조가 살던 곳에서 발견된 쌍날집게는 약 2만년전의 유물로 추정되고 있으며,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인 돌도끼, 돌화살촉, 빗살무늬토기 등 마제석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로 접어들어 성읍국가가 형성되면서 강화도는 발전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부족장의 무덤으로 생각되는 지석묘가 강화일대에 산재하고 있음에서 알 수 있다.
어떤 돌무덤은 수십 톤에 이르는 거대한 돌로 만들어져 있어 대체 그 돌들을 어디서 옮겨 왔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라고 한다. 강화도 일대에 지석묘군이 발견되었으며, 무문토기등 이 시기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강화도는 당시에 하나의 해상 세력으로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쪽의 요새 강화도는 삼국 시대 때부터 주목받아왔다. 고구려와 백제의 국경으로 해전과 육전의 요충지였고, 고구려는 일찍이 이곳에 '혈구군'을 설치하였다. 또한 중국과 해상?육상 통로가 없었던 신라 역시 자주 이곳을 넘보았던 것이다. 고려 시대를 맞아 또 다른 역사적 국면이 전개되는데, 몽고족의 잦은 침략을 피해 고려 고종은 1231년 서울에서 가까운 섬 강화로 천도를 감행.1270년 고려 원종 11년에 환도하기까지 39년간 6차례에 걸친 몽고의 끈질긴 침입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찬 항쟁을 계속하였고, 그러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고려 문화의 정수인 팔만대장경을 만들고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들어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인출하는 등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던 고려의 유적지이기도 하다. 당시의 고려 궁터가 강화읍 관청리에 남아 있다. 조선 인조는 1626년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킨다. 이듬해 인조는 정묘호란을 겪으며 이곳으로 피난했고, 후금과의 강화도 조약을 이곳에서 맺는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강화는 완전히 함락되고 마는 오욕의 역사를 겪는다. 효종은 나라를 잃고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한을 씻고자 북벌계획을 추진하면서 이곳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했다. 군사력 강화는 이후 숙종 때까지 추진되어 12진?보와 53돈 대?9포대가 축조?설치되었다. 이중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스물 여덟 곳이다. 근대에 들어서도 1866년에 일어난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의 격전지가 되었으며, 또한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차지한 곳이 강화도로, 1876년 일본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한 뒤 맺게 된 강화도 조약은 일본의 조선 점령 서막이 되었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의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는 이러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 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강화도에는 고인돌 등의 선사 시대 유물을 비롯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마니산 참성단, 신미양요의 흔적이 남아 있는 초지진 등 다양한 문화 유적이 남아 있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답사보고서 - 절두산 성지를 다녀와서
  • 강화도 교동까지 연결된 조선시대 중요한 도로이다. 경제적으로는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곡물을 운반하는 중요한 조운항구였다. 따라서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어서 진을 구축하고 어영청에서 관리했다고 한다. 또한 직접 가보면 느끼지만 풍경이 아름답다. 지금과 같이 한강 양 옆에 도로가 있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는 풍경이 무척 아름다워서 뱃놀이를 즐기고 정자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전략적 요충지였던 만큼 조선후기에 아픈 역사를 갖고

  • [경영학]첨성단과 전등사를 다녀와서
  • 강화도』를 방문하면 몇몇 전적지와 유적지 , 그리고 도망만 다녔던 우리 민족의 수난사만 생각하기 쉬우나 뜻밖에 가 볼만한 곳이 많다. 강화읍을 기점으로해서 강화성 남문, 오층석탑, 고려궁터, 고인돌무덤, 강화지석묘 등을 둘러보는 유적지 답사코스가 있고 봉천산 고려산,등을 오르는 산행 코스도 좋다. 보문사, 전등사를 돌아보는 사찰 답사, 남부 해안의 해변을 따라 도는 드라이브 코스도 일품이다. 단군신화와 함께 개국설화가 얽힌 참성단

  • [국사] 간송미술관 관람
  • 강화도를 지키다 순국한 우의정 선원 김상용이 별장으로 꾸미면서부터 맑은 바람이 부는 계곡이라는 의미인 청풍계로 바뀌었다 한다. 금강산 내금강 경치를 그린 풍악내산송람도 기억에 남는 그림이다. 이 작품은 위에서 내려다 보는 방식의 그림 이라고 한다. 어초 문답도 대해 교수님이 설명하셨지만 잘 듣지 못하여 조사를 해 보았다. 생활환경이 서로 다른 어부와 나무꾼이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다정하게 걸어가고 있는 장면을 담

  • [기행문] 강화, 전등사 기행을 다녀와서...
  • 답사의 여행은 그런 의미에서 더한 좋은 경험인 것 같다. 오랜만에 떠나보는 나에게 강화도와 전등사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에 제공해주었고, 그런 강화에 기회가 된다면 다시 강화도를 찾고 싶다. 그때도 시원한 바람이 불겠지?▶에피소드허기를 느껴 식당을 찾았지만 횟집 아니면 장어구이 밖에 없어서 저렴한 식당을 찾던중 인근에 가천의과대학을 지나가게 되었다. 산중턱에 자리잡은 작지만 당당히 자리잡은 건물이 너무나 맘에 들어 학생

  • [기행문]동학 농민 혁명 유적지를 다녀와서
  • 답사에 참가하여 열심히 듣고 보고 배울 것 이라고 생각을 했다. 다음 답사에서부터는 시정되었으면 하는 부분이란 바람을 가져보았다. 이제 마지막 답사지역인 삼례지역에 도착하였다. 먼저 이 삼례지역이 갖는 역사적 의의와 상징적 의의에 대해서 알아보자면 동학농민혁명의 1차 봉기가 부정부패 척결을 요구하는 반봉건 운동이었다면 2차 봉기가 일어난 삼례지역에서는 불평등하게 체결된 강화도조약이후 조선의 구석구석까지 침투한 일본군의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