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보고서] 법천사지를 다녀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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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0.28 / 2019.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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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고 싶은 말
- 법천사지를 다녀온 뒤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참고하셔서 좋은 성적 받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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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답사지를 정하기까지
2. 법천사지에 대하여
3. 답사기
4. 답사를 마치고
# 참고자료
-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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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천사지는 강원도 기념물 48호로 강원도 원주시 부론명 법천리 산70번지에 위치해 있다.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다고 하나 사적비도 없고 古記에 그 창건연대를 밝힐만한 자료가 없어 창건연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신라 중원경 출신 승려 진관 선사 釋超가 928년에 법천사의 현권 율사로부터 계를 받은 기록이 있고 사역의 여러 곳에서 통일신라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다수의 선조문평기와 조각이 수습되어 신라 말에 이 지역의 대표적인 사찰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고려 초기 문종대 지광국사 해린 解麟(984~1067)이 만년에 주지로 부임하고 후에 열반함으로써 더욱 큰 가람으로 번영하게 된다. 그것은 고려 선종 2년 1085년에 이 절에 지광국사의 부도와 탑비, 이를 안치하기 위한 부도전이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법천사는 매우 중요시 되었는데 지광국사탑비 뒷면에 왕이 현화사에 이어 법천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광을 누리던 법천사는 13세기 초반 글안병의 침입을 받은 것 같다. 고려 고종 4년 1217년에 글안은 원주, 동주 등지에 침략, 파죽지세로 제천 등지로 휩쓸 때이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고려군이 글안병을 쫓아 법천사에 내려갔음을 알 수 있다. 고기에는 글안의 침입으로 가람이 크거나 훼손되었다고는 나타나지 않으나 다른 예를 보아서는 피해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역에 유존한 여러 유물로 보아 법천사는 고려와 함께 운명을 같이 했다. 사역 안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유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니까 조선이 개국하자 폐사되었다고 보아야겠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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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건축문화재(박경립. 1999. 기문당)
▫ 한국의 폐사(이재준. 1995. 한국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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