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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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
1. 내 삶의 모델
나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사람에 대해 글을 쓰라고 하셨을 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분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를 이 세상에 있게 해주시고 20년을 길러주신 부모님보다도, 12년의 학창시절 동안의 그 많은 은사님들보다도, 나를 가장 많이 자라게 해주신 분. 나에게는 아직까지도 내 삶의 모델로 마음속에 모시고 있는 수녀님이 한분 계시다. 그 분을 만나지 못했어도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을까.
2. 가난하고 행복한 자들
나는 3학년 때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그때 신도시 개발과 함께 우리 동네에 새 성당이 지어지면서 새로운 수녀님이 오셨다. 그분이 바로 나탈리아 수녀님이셨는데, 수녀님은 어린 나를 유난히 귀여워해주셨고 나도 수녀님을 잘 따랐다. 수녀님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처럼 나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다. 특히 수녀님께서는 필리핀에서 종교교육학을 전공하시고 타지로 구호활동을 자주 다니시는 분이셨기 때문에 선교활동 중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자주 해주시곤 하셨다. 아주 가까운 곳에, 혹은 아주 먼 곳에 있는 우리와 피부색이 조금 다른 아주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가 생각하기엔 아주 불쌍하고 가난할지 몰라도 자신들은 아주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하고 행복해 하는 그런 착한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와 너무 다른 환경에서 너무 다르게 살고 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너무 차고 넘치고 그들은 너무 모자라서 바닥이 드러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그들과 함께하면서 나에게 가득 차 넘치는 걸 퍼 담아 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난 어릴 때부터 모태신앙으로 성당에 다니면서 성소의 꿈을 키웠었는데 그 때 수녀님께서 해주시는 그 이야기들은 어린 나에게 ‘아, 이것이 정말 보람된 일이구나’ 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고,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성소에 꿈보다도 나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그때 나는 진로를 정한다거나 미래를 생각하기에는 어쩌면 조금 어린 나이였을지도 모르지만 수녀님과의 시간은 수녀님처럼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나의 꿈을 키워나가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4년 정도를 수녀님과 함께 할 수 있었고 4년이 채 되지 않았던 그 해 겨울, 수녀님께서는 아프리카 잠비아로 선교활동을 하러 떠나셨고 그렇게 수녀님과의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2-1. 갈등과 회의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진로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성소의 꿈을 접게 되었다. 그래도 마음속에 담아놓은 것이 있어서 사회복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급여와 근무환경, 전망 등 현실적인 면을 보게 되면서 심한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고3 수험생이 되면서 대학을 알아보고 과를 선택하고 선생님과, 아버지와 상담을 하면서 ‘왜 굳이 그 힘든 사회복지를 하려고 하느냐’ 는 질문을 자꾸 받으니까 정말 내가 왜 이 길을 가려고 하는지에 대한 회의가 들면서 어쩌면 이것이 그냥 ‘착한 일이니까, 좋은 일이니까’ 하는 생각으로 막연히 정해놓은 진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점점 연봉도 높고, 안정적이고, 모두들 선호하고, 주목받을 수 있는 유망한 직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나는 멋있는 직업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고 또 한 번 회의를 느꼈다. 그때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조차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그런 내 모습에서는 진정한 나를 찾을 수가 없어서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막막했다. 정신을 다잡고 싶었지만 10년이 넘게 생각하고 있던 나의 진로라고 생각했던 것을 고작 다른 사람의 몇 마디 말에 흔들려서 헤맬 만큼 나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에 스스로 실망을 해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가 않아졌었다.
2-2. 수녀님의 선종
한창 고민에 빠져있던 4월에 나는 심장이 덜컥 하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탈리아 수녀님께서 아프리카에서 갑작스런 급성 말라리아로 선종하셨다는 소식이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수녀님만은 연락이 닿지 않아도 어디서든 주님께서 지켜주셔서 건강히 지내실거라고 생각했었고, 수녀님께서 돌아가시는 일 같은 건 영원히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지 나는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도 믿을 수가 없어서 한참동안 충격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었다. 그때 정말 부모님께서 돌아가신다면 이런 느낌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내가 받은 것은 충격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그 때 받은 그 느낌은 충격과 어떤 존경심과 같은 감동이었다. 가시는 그 순간까지 평생 다른 누군가를 위해 보람된 일을 한다는 것, 수녀님은 그들과 함께 살다가 죽음이 당신을 덮치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들 곁을 떠나셨다. 이건 누구도 쉽게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예전에 그 다짐을, 그 마음을 잊고서 속물처럼 자란 내가 한없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수녀님의 선종은 일순간 흐트러진 내 마음을 잡았고, 수녀님과 함께했던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다시 찾아 주었다.
3. 그분의 이끄심
그렇게 마음을 다시 다잡고서 시간이 지나 나는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고 간절하게 바라는 것을 이루고 나자 이것은 어쩌면 어릴 적 내가 다짐했던 그 순간부터 정해진 나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수녀님처럼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수녀님처럼 따뜻한 사람으로 기억 될 수 있기를 늘 바랐다.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마음에 품고 감사함을 느끼며 살 수 있게 해주신 수녀님께 너무나 감사하다. 수녀님은 나에게 어머니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 사랑을 주신 분이셨다. 수녀님을 생각하면 이분은 하느님께서 일꾼으로 쓰시기 위하여 만드시고 다시 데려가신 게 아닐까 싶다. 하늘에서 받으신 성품이 다른 사람보다 훌륭하신 그런 분. 김만중, 「어머니 해평 윤씨의 행장: 과부의 자식이란 말을 뼈에 새겨라」, CAP 교재물, 82쪽
늘 사랑이 느껴지고 모든 면에서 배우고, 느끼고, 정신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 만큼 많은걸 전해주시는 따뜻하셨던 수녀님. 나는 아직도 내가 왜 사회 복지를 전공으로 선택했는지, 내가 정말 누군가를 위해서 수녀님처럼 헌신적인 삶을 살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직도 뚜렷한 확신도 없고, 자신도 없고, 내가 남을 위해 살 수 있는 그런 품성을 지녔는지도 잘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다고 믿고 있는 건 내가 수녀님을 닮고 싶다고, 수녀님의 뒤를 따르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희미하게나마 내 앞길이 무언가에 이끌림에 따라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곁에 계신 것처럼 수녀님께서 날 지켜봐 주시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릴 때의 나의 그 다짐이, 지금의 내 믿음이, 그리고 미래에 대한 내 확신이 앞으로의 나를 만들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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