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십, 경영, 경영자의 자질] 태종 이방원의 위기관리와 리더십을 통해 본 경영자의 자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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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목 차>

Ⅰ. 서 론 Ⅳ. 태종의 정치성공의 이유
Ⅱ. 태종의 위기관리와 통치력 Ⅴ. 결 론
Ⅲ. 태종의 위기관리의 체계화
본문내용
Ⅱ. 태종의 위기관리와 통치력

태종은 아버지 이성계에게서 위기관리능력을 이어받고 있는데다가 스스로 기획력까지 갖추었다. 위기관리체제를 제도화하는 능력까지 겸비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그가 무인의 기질과 명석한 두뇌를 두루 갖춘 인물이었음을 말 해준다. 태종은 이성계 가문에서 처음으로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고려 우왕 9년, 그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이방원은 예문관 재학을 지냈고 왕의 비서인 밀직사대언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조선의 역대 임금 중 유일하게 신하의 관직을 경험한 국왕인 것이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감행했을 때가 이방원의 위기관리 능력이 첫 선을 보인 때였다. 회군소식을 전해 듣자, 이방원은 즉시 친어머니인 한씨와 둘째어머니 강씨가 있는 포천으로 달려가 고향인 함흥으로 피신 길에 나섰다. 재빨리 우왕과 최영의 보복을 피하고 보자는 판단을 한 것이다. 최영 쪽에서도 요동정벌군이 떠날 때부터 이성계의 가족을 인질로 삼으려 했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가가 공교롭게도 이방원에게 기선을 빼앗긴 셈이 되었다. 두 번째로 그의 신속한 판단, 발빠른 대응능력이 빛을 본 적은 공양왕 4년 이성계가 낙마 했을 때 재빨리 이성계를 귀경하게 하고, 정몽주를 제거했을 때였다.
이방원의 운명과 신생 조선왕조의 진로가 바뀐 1차 왕자의 난도 이방원 자신의 능력이 부각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태조가 건국 직후 둘째 부인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뒤 개국공신대열에조차 끼일 수 없었던 이방원은 정도전, 남은 등 문관개혁세력의 독주에 반발하는 조영무 등 무장세력과 고려의 구귀족 등 반개혁세력들을 포섭하며 정국동향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한 가운데 정도전이 주도하는 사병혁파가 점차 고삐를 조여 오기 시작했다. 진법훈련에 불참하며 소극적인 학파 반대의사를 표시했으나 반영되지 않았다. 이방원의 사병도 혁파되었고, 집안에 있던 무기들도 수거되었다. 이제 이방원은 고사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다. 이때 충청도 관찰사로 외직에 임명되어 중앙정치무대에서 밀려나가게 된 이방원의 일급참모 하륜이 선수를 쳐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방원은 아버지의 이복동생인 삼촌 이화와 이복형의 아들 이천우 등을 포섭하고, 동복 둘째형 방과와 넷째형 방간과도 손을 잡았다. 이성계 휘하의 무장 조영무, 장사길, 이거이 등도 합류시켰고 매부인 무장 민무구, 민무질 형제도 가세케 했다. 때마침 신덕왕후의 능 이장공사를 위해 사역꾼을 이끌고 상경해 있던 안산군수 이숙번도 합류하게 했다.
정도전 등이 왕자들을 대궐로 들어오도록 통고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398년 8월 26일 밤, 신덕왕후가 병사한 뒤, 상심 끝에 병석에 누운 태조를 치료하기 위해 다른 곳으로 피접을 가려고 하니 문안을 드리러 오라는 전갈이었다. 이방원 등 왕자들을 일거에 제거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대궐에 들어가다 부인 민씨의 연락을 받고 되돌아 나온 이방원은 부인 민씨가 사병해산 때 감추어 두었던 병장기를 나눠 들고 기습에 나서게 된다.
그날 밤 정도전은 자기 집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남은의 첨의 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습격을 받고 달아났다가 붙잡혀 죽게 된다.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의 2인자인 정도전이 호위병사도 거느리지 않고 거동했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지휘자를 잃은 조정의 관군은 소수의 이방원의 군에 의해 붕괴되었다. 이방원의 기민한 작전이 돋보이는 점이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정도전과 남은은 왕자들의 불만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누가 보더라도 궁지에 몰리고 있는 이방원이 최후의 몸부림을 칠 가능성이 점쳐지는 상황에서, 정도전은 이방원과 그 지지 세력의 동태감시에 소홀했다. 대궐에서 올 왕자제거 소식을 기다리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하나, 그 같은 비상사태 아래서 호위병사도 없는 무방비상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설사 왕자제거 음모의 시나리오가 태종 때 왕조실록이 편찬되는 과정에서 수정되거나 조작된 것이라 할지라도 정도전의 무방비상태는 설명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민씨가 무기를 감출 수 있게끔 사병해산과정을 철저하게 관리하지 않은 것도 실수였다. 사병해산이 실질적으로는 이방원의 무력화를 노린 포석이었기 때문이다. 이방원 측의 동태를 제대로 살폈다면 이방원의 사람인 이숙번에게 관군이기도 한 사역꾼을 지휘하고 입경하게 하는 실책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다.
1차 왕자의 난이 성공한 것은 태조가 국가기강을 제대로 잡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측면도 있다. 요동정벌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대 사업이다. 이에 대비하는 군사훈련에 공공연하게 불참하는 행위는 극형에 처할 수 있는 명령불복종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훈련을 기피한 이방원 등 왕자와 종친들을 문책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고 부하들이나 종들이 대리로 태형을 맞게 했다. 일종의 경고처분만을 내렸다. 몇 사람을 극형에 처하는 등 일별백계로 나갔더라면, 단번에 서슬이 퍼렇게 기강을 잡을 수 있었고 쿠데타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국왕의 영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는 것이 예삿일이 아님을 역전의 장군 출신인 태조가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시 태조는 요동정벌을 감행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를 놓고 기로에 서있었음이 분명하다. 정도전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몇 년째 전쟁준비를 시키면서도, 조준의 전쟁불가론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짐작할 수 있다. 2인자 격인 배극렴이 죽고 난 뒤 정도전과 갈등관계에 들어가 있던 조준은 국가건설기에 피로한 백성을 또 전장에 끌어내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되지 못하고, 이씨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명나라의 지지가 필요하다면서 신중론을 펴고 있었다. 이성계는 조준의 실리론을 귀담아들었다.
그러나 군비를 포기하기도 아쉬웠다 조선 최고의 명장인 만큼 생각이 여러 가지로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존망이 걸린 최대의 현안에 대해 국가지도자로서 분명하고 확실한 지도노선을 제시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얼버무린 것이 결국 화를 자초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18개월 뒤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방원이 국왕자리를 차지하기 전에 맞은 마지막 위기였다. 제2대 국왕으로 즉위한 정종은 실세인 동생 이방원의 눈치를 봐야하는 처지인 데다가 뒤를 이을 적자가 없었다. 공식적인 후사가 없기 때문에 넷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이 서로 눈치를 보며 경쟁하는 상황이 전개 되었다. 방간이 선수를 쳐 먼저 군사를 일으켰지만 방원의 군대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다. 방간은 역전의 무장들과 정예병사로 구성되었고 전투력과 조직력을 갖춘 방원에게 적수가 되지 못한 것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소속 갑사들이 방간의 군에 가담한 일 때문에 정종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이방원은 정종의 동생이면서도 세제가 아닌 세자로 책봉되었다. 종법에 따른다면 정종의 첫아들인 원생이 정비소생은 아니나 세자자격이 있었다. 그러나 정종도 방원의 힘에 밀려 아버지 태조처럼 변칙의 길을 택한 것이다. 무리하면서까지 이방원이 세자라는 호칭을 확보한 것은, 왕권을 승계 받으면서 아버지 태조로부터의 정통성까지 승계받는 것을 고려한 포석이었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오인환, 『조선왕조에서 배우는 위기관리의 리더십』, 열린책들, 2003
정두희, 『조선초기 정치지배세력연구』, 일조각, 1983
이재룡, 『조선초기 사회구조연구』, 일조각, 1984
한충희, 『국사관논총』, 「조선전기의 권력구조연구」,1990
신재정, 『경영학원론』
문규현 ․ 홍정효,『경영학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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