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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 사고, 충주 사고)→4사고 체제(세종대/+경상도 성주 사고, 전라도 전주 사고)-조선후기 : 임진왜란이 사고의 위치에 대해 재인식을 하는 계기가 됨. 조선 후기에는 5사고 체제로 운영(서울의 춘추관 사고, 강화도의 마니산 사고, 평안도 영변의 묘향산 사고,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 강원도 평
70페이지 | 3,400원 | 2010.08.14
실록청의 당상이나 낭관들은 춘추관의 사관(史官)직책을 겸하고 있는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의 관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편찬할 분량이 많은 경우에는 전 조정을 망라하여 학문과 문장에 조예가 있는 관원들이 수찬관기사관 등으로 임명되었다.실록의 편찬은 대체로 3단계를 거치면서
16페이지 | 1,400원 | 2010.07.23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의 4사고에 각기 1부씩 봉안했다. 봉안 할 시에는 실록청의 총재관, 당상, 도청낭청 등이, 외사고에는 봉안사와 종사관, 관상감원 및 서리, 고직, 영리 등이 동행하여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했다.그리고 사고에 보관된 실록과 시정기를 포쇄했다. 포쇄는 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7페이지 | 1,200원 | 2010.01.15
실록청(修正實錄廳)을 설치하고 가장사초(家藏史草)와 비문(碑文), 행장(行狀), 야사(野史), 잡기(雜記) 등 자료를 수집하여 수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조 24년(1646) 정월에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록 수정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효종(孝宗) 8년(1657) 3월에 이르러 우의
9페이지 | 1,400원 | 2010.01.15
춘추관 내에 임시로 설치된 실록청(또는 撰修廳일기청)에서 담당하였다. 실록청의 총재관(摠裁官)은 재상이 맡았으며, 대제학 등 문필이 뛰어난 인물이 도청(都廳) 및 각방 당상(各房堂上)으로 임명되었다. 시정기(時政記)와 사관(史官)이 개인적으로 작성한 사초(史草), 각사 등록(謄錄), 《승정원일기
28페이지 | 4,300원 | 2010.01.01
춘추관․충주․성주․전주 등 4대 사고(四大史庫)에 비치했다.3. 편찬 방법:왕의 사후 춘추관 내에 실록청(實錄廳)을 두고 사관의 사초(史草)를 기준으로 하여 승정원 일기․의정부 등록․비변사 등록․일성록․시정기 등을 보조 자료로 하여 편찬하였다. 특히, 광해군과 연산군 때는 일기(日記)로 표
714페이지 | 6,800원 | 2009.12.24
실록청에서 각사등록과 조보 및 전임주서가 소장하고 있는 가장사초를 널리 수집하고 또한 실록청의 당상관은 사관의 근무태도를 철저히 감독했다. 한달에 3일 빠진 자는 추고하고, 5일을 빠진 자는 파직했다. 이런 조치는 『승정원일기』를 개수하는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2. 이괄의 난 이후의 개수
7페이지 | 1,200원 | 2009.01.21
춘추관과 불의의 사고에 대비하기위해 각지 깊은 산중에 소재하던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왔다. 끝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일본, 중국, 몽고 등 동아시아 제국의 역사연구, 관계사 연구에도 귀중한 기본자료이기도 하다.(3) 직지심체요절의 유래 및 의의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이하 불조직지
16페이지 | 500원 | 2008.12.10
실록청의 당상이나 낭관들은 춘추관의 사관(史官) 직책을 겸하고 있는 예문관(藝文館)과 홍문관(弘文館)의 관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편찬할 분량이 많은 경우에는 전 조정을 망라하여 학문과 문장에 조예가 있는 관원들이 수찬관기사관 등으로 임명되었다.실록의 편찬이 공포되고 실록청이 설치되
17페이지 | 1,700원 | 2008.09.02
춘추관’으로 평소에는 실록에 쓰일 자료를 준비하고 있다가 당대의 왕이 죽으면, 그 다음 왕대에 실록편찬을 위한 임시기관인 실록청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실록에 들어갈 자료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한다. 실록청은 실록이 완성되기까지의 임시기관으로 실록이 완성되면 실록청은 해산했
19페이지 | 1,700원 | 2008.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