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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관직을 맡은 당상관1인과 한림1인이 함께 갔으며, 당상 유고시에는 한림이 혼자 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실록을 봉인할 때에도 내사고에는 실록청 총재관당상도청낭청등이, 외사고에는 봉안사와 종사관관상감원 및 서리고직영리 등이 동행하여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실록이 완
3페이지 | 1,000원 | 2004.11.06
춘추관을 중심으로 실록청을 설치하고 관련 자료를 종합, 정리하여 실록을 편찬하였다. 실록은 태조 실록 이후 조선 말기까지 계속 편찬되어 역사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고 있다. 15세기 중엽에는 고려 왕조의 역사를 자주적인 입장에서 재정리하고자 하여 기전체의 고려사와 편년체의 고려사절요가
8페이지 | 1,500원 | 2004.10.22
춘추관이었다. 춘추관은 평소에는 실록에 실릴 기록을 준비했고, 실록을 편찬할 때는 임시기관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평소에 춘추관에서 준비하던 자료는 무엇일까? 물론 국정에 관한 자료였다. 조선왕조에서 국정의 중심은 국왕이었기에 국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
33페이지 | 2,300원 | 2004.09.10
춘추관의 사관으로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도 틈이 생겼으며, 이런 점에서 유자광과 이극돈은 이들에게 보복할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때마침 1498년(연산군 4) 전례에 따라 실록청이 개설되어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그 당상관이 된 이
8페이지 | 900원 | 2004.07.08
실록청(實錄廳) 설치. 청주성 화약고에 낙뢰. 세곡방납(稅穀防納)의 폐를 바로잡음. 왕, 창덕궁으로 환어(還御).1836년 프랑스인 신부 모방, 의주(義州)를 거쳐 밀입국. 소의 밀도살, 금광(金鑛)의 잠채(潛採)를 금함.1837년 충청도 대흥군(大興郡)에서 성국로(成國老) 등이 집권자들의 죄를 폭로한 괘서(掛
29페이지 | 0원 | 2004.05.19
춘추관의 領監事 이하 堂郞이 陪進하고 창덕궁 춘추관의 사고에 봉안하였다위 기록에서 실록과 어람부록을 포함하여 84책을 춘추관 및 지방의 4대 사고에 보관하고 어람부록 1책만을 왕에게 올린 정황을 알 수 있다. 御覽附錄을 封 한 후 실록을 封 하는 의식이 행해졌다.『헌종대왕실록청의궤』에
13페이지 | 300원 | 2004.01.01
춘추관과 각 사고에 보관했다.실록 편찬이 완료되면 시정기와 초초중초는 자하문 밖에 세검정 부근 차일암에서 세초하여 종이로 재생하여 썼다. 세검정 가까이에 종이 공장인 조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록편찬에 관련된 일체의 자료를 세초했던 것은 이 자료들이 후일 누설되어 사단이 일어날까
5페이지 | 500원 | 2003.1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