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때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때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 탑의 높이는 무려 80여미터에 이른다.
경제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목재공학적 측면에서도 수작업으로 목재를 조각한 정교함이나 못이나 접착재를 쓰지 않고 나무끼리의 견고한 이음, 또 아파트 30층에 달하는 높이의 목탑을 쌓아올린 기술 이라든가를 지금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예전보다 사람들의 삶의 환경이 훨씬 나아진 지금 웰빙이며 친환경에 관심이 모아지는데 목재야 말로 이에 부합하는 재료가 아닐까 생각하면 목재발전에 희망을 걸어본다.
목재공학적 관점에서 본 황룡사 9층 목탑우리나라 고대건축의 최절정은 신라시대 때의 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그 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의 최절정은 바로 황룡사이다. 건설기간만 약 100년, 지금은 아쉽게도 그 터만 존재하지만 기록에 의하면 동양최대의 사찰임에 틀림없다.황룡사에는 고대 목조건축양식이 얼마나 훌륭했는가 예측할 수 잇는 9층 목탑이 있다. 기록에 의하면 탑신부 약 65m, 상륜부 15m로 전체 80m에 이른다고 하는데 이해하기 쉽게 말해
황룡사는 1238년 몽고의 침략으로 불에 타 소실됨으로써 결국 그 넓은 터를 초석들만이 쓸쓸히 지키고 있을 뿐이다. 공포처럼 사찰에 쓰이는 목재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건조과정을 거쳐 문 등의 휨을 방지하고 그다음 절삭과정을 필히 거쳐야 이음새에 쓰이는 것들까지도 제 용도에 맞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지역할보다는 추녀 및 서까래의 경우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곡선미를 어떻게 잘 표현하여 절삭과정에 응용될 것인지 고민
목재의 무게도 충분히 견딜 수 있었으며 미적인 아름다움까지 표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공포식 구조는 현재에서도 사용되면 목재 공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안정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구조는 현대의 건축에서 사용된다면 역학적인 안정성뿐만 아니라 미적인 측면에서도 충분히 세계적으로 인정받을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듯 황룡사 9층 목탑은 규모뿐만 아니라 여러 부분에서 많은 것들을 간직하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고려 고종 25년(1238)
황룡사라는 글씨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사리 그릇은 부처의 사리를 봉안했던 것이었다. 그것을 청동 소함이 감싸고 있었고,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금동팔각사리탑도 사리구 안에 함께 보존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가로, 세로 23cm 크기의 사리 내함에 들어 있었고, 마지막으로 이것을 사리 외함이 감싸고 있었다. 특히 사리 내함의 경우 세면에는 안팎으로 황룡사9층탑의 내력을 담은 「찰주본기」가 적혀 있다. 바로 그 찰주본기에 황룡사9층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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