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작품 및 문학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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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다산 정약용의 생애 : 1762(영조38)~1836(헌종2)

(1) 1기 - 수학기와 사환기(修學期/仕宦期) : 벼슬살이의 득의 시절 (1762~1800)

(2) 2기-유배기(流配期) : 귀양살이의 환난시절 (1801-1818/ 39세부터 18년 동안)

(3) 3기- 해배후 향거시기(鄕居時期) :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유유자적 시절 (1819-1836)

Ⅱ.다산의 작품

(1).「애절양(哀絶陽)」-목민심서, 兵典六條, 제1조 첨정(簽丁) 편

(2).「해랑행(海狼行)」

(3). 자찬묘지명

Ⅲ. 다산의 문학사적 의의 : “민생의 애환을 읊으며 시대를 근심하는 조선시”

Ⅳ. 참고 문헌

본문내용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고 하였다. 아! 이 두 말이 내 병에 약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은 차갑다 못해 따끔따끔하며 뼈를 끊는 듯하니, 부득이하지 않으면 건너지 않는 것이다.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하는 것은 몸 가까운 데서 지켜보기 때문이니 비록 매우 부득이하더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 여유당기 中
이는 정조 없는 세상을 그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잘 말해준다. 정약용은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처럼, 사방의 이웃이 자신을 감시하는 것처럼 매사를 조심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당시 소론과 남인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되는데, 이 때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었다. 결국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과 다산은 유배를 가게 됨으로써 정약용의 득의시절은 막을 내린다.
1801년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됨으로써 그의 제2기인 유배생활이 시작된다. 정약용을 죽이려는 세태 속에서 정약용의 피안의 세계는 오직 학문이었다. 그는 문을 닫아걸고 죄수처럼 머리도 빗지 않고 1815년 문산 이재의에게 보낸 정약용의 편지에서
학문에 쉬지 않고 매진했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 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의 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정약용은 귀양지 경상도 장기에서 농민들의 삶을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누구 하나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해도 못사는 이유를 정약용은 관과 지배층의 수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상추쌈에 보리밥을 둥글게 싸 삼키고 / 고추장에 파뿌리만 곁들여 먹는다네
금년에는 넙치마저 구하기 어려운 것은 / 모조리 건포 만들어 관가에 바쳤기 때문 「장기농가」中

정약용에게 시는 자신의 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법이었다. 후술할 ‘애절양’은 다산의 이런 시론에서 나온 절창(絶唱)이다. 정약용은 백성을 위해 임금이 있고 목민관이 있는 것이지 그 역(易)의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권력의 원천인 천명을 백성들의 마음으로 여겨, 천명이 떠나면 그 왕조는 멸망하는데 멀쩡한 백성의 생식기를 잘라야하는 나라에 붙어 있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다. 정조 사후의 조선은 이미 천명이 떠난 나라였다. 그래서 그는 감사나 임금이 도적에 지나지 않는다고까지 생각했다.

(3) 3기- 해배후 향거시기(鄕居時期) : 귀양이 풀려 고향에 돌아온 유유자적 시절 (1819-1836) 말년인 57세 되던 해에 유배에서 풀려 고향에 돌아온 후 저술을 계속하여『목민심서』를 완성,『흠흠신서』,『아언각비』 <목민심서> 48권 : 현재 법도로 인민을 다스리고자 목민관을 깨우치고,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돌아가도록 함. // <흠흠신서> 30권 : 인명에 관한 옥사를 다스리는 책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관련 자료를 모아 옥리들이 참고하게 함으로써 원한의 소지를 없애도록 함 (정약용이 형조를 맡으며 취했던 행정방침은 악의가 없는 사건은 되도록 관대하게 처분하는 것이었는데 죽이기보다는 살리기를 좋아하는 형법을 펴자는 것이었다.) // <아언각비> 3권 : 시문잡저
등의 저작을 내놓는다. 또한 회갑을 맞아서는 자서전적 기록인「자찬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하고 자연을 유람하며 말년을 보내다가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둔다.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참고문헌
1. 민족문학사연구소 고전문학분과,『한국고전문학 작가론』,소명출판, 2003.
2. 황패강, 『한국문학작가론 3』,「정약용 편- 김상홍」, 집문당, 2000.
3. 이덕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2』, 김영사, 2005.
4. 금장태, 『실천적 이론가 정약용』, 이끌리오, 2005.
5. 박석무, 『다산정약용 유배지에서 만나다』, 한길사, 2003.
6. 다산학술문화재단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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