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개항]19세기 개항과 대원군의 쇄국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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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본론
1) 19세기 조선의 개항
(1) 운요호 사건
(2) 강화도조약과 서양에의 개항
2) 조선의 개혁반대 세력
(1) 조선의 위정척사 운동
3) 조선의 개화운동
(1) 수신사의 파견
(2) 제도의 개편
(3) 신사유람단과 영선사의 파견
4) 대원군의 개혁
(1) 대원군의 개혁
(2) 인재의 등용
(3) 국가 재정의 확보
(4) 서원정리
(5) 국가기구의 정비
(6) 경복궁의 증건
5) 대원군의 개혁평가
3. 결론
- 참고문헌-
본문내용
대원군은 10년이라는 짧은 집권기간 동안 많은 정책들을 추진하였다. 또한 그 정책들은 어느 것 하나 수월한 것이 없었고, 이전의 집권자들도 항상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나 어떤 제왕도 해결의 대안을 내놓거나 단호하게 정책을 추진하지 못했기에 대원군의 결단력 있는 추진은 개혁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세도 정치를 타파하고,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통한 봉건적 정치 구조를 혁신하려는 모습에서 그를 근대 지향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대원군이 그처럼 근대 지향적인 인물이었다면 왜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해야 했을까? 그 첫 번째 답은 지나친 쇄국으로 인해 조선 전체가 근대적인 시각과 능력을 갖출 시간적인 여유를 박탈했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이전에도 많이 거론되어 왔던 이유이다.
두 번째로 앞서 언급했던 그의 결단력 있는 개혁의 이면에서 근대적인 요소보다는 오히려 전근대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다. 많은 학자들이 대원군의 개혁 정치중 경제적인 실책(경복궁 중건으로 인한 무명잡세 징수, 당백전 발행 등)에 대한 문제점만을 제기했지, 그의 세도정치 타파와 능력위주의 인재등용, 서원 철폐, 조세 제도 개혁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왔다. 그러나 이것의 이면에는 전혀 다른 이상이 숨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대원군은 서원 철폐나 조세 개혁을 통해 양반들의 특권을 많이 빼앗았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인 평등한 개혁이라기 보다는 농민들의 불만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계책이 숨어있었다.
대원군의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이야기할 때 자주 거론되는 것이 중인, 서리, 서얼들을 정치에 참여시킨 사실이다. 물론 이들은 대원군의 사조직 속에 널리 분포하여 통치 도구로 활용된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이들의 정치적 지위를 보장하는 어떤 '제도 개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당시 중인들의 정치적 지위를 요구하는 운동이 이미 상당한 수준까지 이르고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이것의 한계가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참고문헌
대원군의 시대/ 리선근/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0
강화도의 서양함대와 대원군/ 이정범/ 서강출판사/ 20005
한국개화백년사/ 이현희/ 한국학술정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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