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와 다문화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발칸반도의 인종분쟁 민족주의란 유고슬라비아 연방국 보스니아 내전 코소보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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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민족주의와 인종주의; 발칸반도의 인종분쟁
현대사회와 다문화의 이해
CONTENTS
1. 민족주의란?
2. 발칸반도의 역사와 인종분쟁
- 18세기 이전 발칸반도의 역사
- 1~2차 발칸전쟁, 1차 세계대전의 발발
- 유고슬라비아 연방국의 형성
- 보스니아 내전
- 코소보 사태
3. 결론
민족구성(범슬라브, 범게르만)
종교구성
… 지도와 연관해서 얼마나 다양한 민족과 종교, 문화가 혼재돼있는지
1. 민족주의란?
민족주의란?
언어
역사
종교
습속
혈통
Nation
비뚤어진 애국심을 포장하고국수주의적 사상을 주입하는 데 악용
. nationalism의 번역어로,. nation과 nationalism은 이후 민족과 민족주의로 번역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혈통적인 연계성이 특히 강조
등질적인 공동체를 구획해 타자와 구분되는 하나의 집단인 Nation 설정
이러한 공동체에 걸맞은 독립적인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상
이 과정에서 혈통적인 연계성이 특히 강조
민족주의의 주체로서 Nation이라는 개념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
민족이 스스로를 정치적 공동체의 주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부터 민족주의라는 구체적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공동목표로 갖게 됨
민족주의란?
비뚤어진 애국심을 포장하고국수주의적 사상을 주입하는 데 악용
민족주의의 주체로서 Nation이라는 개념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
민족이 스스로를 정치적 공동체의 주체라는 인식을 갖게 되면서 부터 민족주의라는 구체적 이데올로기를 그들의 공동목표로 갖게 됨
ㆍ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17세기영국에서 처음 시작
ㆍ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대륙의 외부 세력들과
맞서며 배타적 집단 의식 형성
ㆍ 그것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며 영국 민족의 정체성 확립
ㆍ 식민지배를 겪은 나라들은 저항을 위해 민족주의 도입
ㆍ 19세기 미국, 라틴아메리카, 동아시아 등이 이에 해당
식민지를 겪은 나라들의 민족주의 도입 과정은 조금 다르다. 19세기 서구 열강의식민지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들이 서구 식민 지배자에게 저항하기 위한 결속의 근거를 삼기 위하여 도입한 것이다. 이른 시기의 예로는미국 독립전쟁이나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열풍이 있고, 19세기 후반에는동아시아를 포함한 세계 각지에서 저항을 위한 민족주의가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민족주의는제국주의자들과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세력
양쪽 모두에 사상적 토대를 제공
민족주의란?
“민족주의는 세력에 대한 갈망이되,
이 갈망은 자기기만으로 완화될 수 있다.”
민족주의의 요람이었던 유럽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EU의 결성으로 현재는 민족주의가 약해졌다
모든 민족주의자는 자명한 거짓을 범하면서도 자신이 옳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질 수 있다.
ㆍ 비뚤어진 애국심을 포장하고국수주의적 사상을 주입하는 데 악용되기도 함
ㆍ Nation의 개념이 당시 유행하던 사회진화론, 우생학, 인종차별 등과 결합
→ 혈통적인 민족 관념 대두
ㆍ 이러한 경향은 1차 세계대전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는 사건으로 표출
2. 발칸반도의 역사와 인종분쟁
- 19세기 이전 발칸반도의 역사
- 1~2차 발칸전쟁, 1차 세계대전의 발발
- 보스니아 내전
- 코소보 사태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1918년에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세르비아인은 연합하여 최초의 발칸 단일국유고슬라비아를 형성한다.
문화적, 종교적, 민족적 다양한 구성원이 섞여 있기 때문에
화약고임!!! (단순히 민족구성 말고 문화적, 종교적 역사 설명)
# 연도별, 선형으로 사건 정리
큰 사건에 대한 구체적 설명
당시 유럽엔 범 슬라브 주의나 범 게르만 주의 같은 민족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이당시 범 슬라브 주의 역시 2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발칸 반도의 슬라브 국가의 연방국가를 기획하는 운동, 하나는 러시아 중심의 슬라브 통일민족을 만드는 운동.
19C 이전 발칸반도사
Balkanize ;
서로 적대시 하는 여러 작은 지역으로 분열시키다.
ㆍ 발칸반도는 차별적, 비하적 표현!
EU에서는 이곳을 남동유럽이라고 부름
ㆍ 불가리아에 트라키안, 크로아티아/세르비아에
일리리안 등이 최초로 정착해 있었다고 추정
ㆍ 기원전 8세기부터는 마케도니아 거주민들이
왕국을 건설하여 발칸반도 중부지역을 차지
(서쪽으로는 로마 세력이 강성해 동쪽으로 진출)
ㆍ 알렉산더 사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크게 무너지고
그 틈을 타 성립된 왕조들도 결국 로마에 복속
<21C 발칸반도의 지도, naver>
참고문헌
Reference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하여: 민주화 운동인가 극우 민족주의의 난동인가? / 정재원, 국민대 교수
참고논문
참고도서
발칸분쟁사(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 김성진
발칸의 역사 / 마크 마조워
민족주의 비망록 / 조지 오웰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 / 신기욱
웹사이트
1. 민족주의에 대하여
https://mirror.enha.kr/wiki/%EB%AF%BC%EC%A1%B1%EC%A3%BC%EC%9D%98
2. 유고슬라비아의 형성과 내전에 대하여
http://www.woorigachi.com/xe/europe/980
코소보 내전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퓰리처 사진전을 보며 의아해 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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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통의언어,역사,종교, 습속, 혈통 등의 특징들을 기준으로 등질적인 공동체를 구획하여 타자와 구분되는 하나의 정체성과 국가를 공유하는 집단인 nation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이 공동체에 걸맞은 독립적인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사상. nationalism의 번역어로,. nation과 nationalism은 이후 민족과 민족주의로 번역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혈통적인 연계성이 특히 강조.
이러한 근대적 의미의 민족주의는 보통 17세기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섬이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대륙의 외부 세력(숙적인프랑스나 여타가톨릭세력 등)들과 맞서면서 영국인이라는 배타적 집단 의식이 형성되고, 그것이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국 국가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면서 영국 민족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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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국민 국가 건설의 관념은 전통적 계급구도를 뒤엎어 놓은 시민혁명기를 거치면서, 그리고계몽사상이 보급되면서 정치 참여에 대한 의지를 갖는 시민들 사이에 확산되었다. 이는 이전의봉건제도에 의한 분절성을 극복하고 통일적인 국가가 성립하는 데 강한 추동력이 되었으며, 지식 및 교육의 확산과 정치 참여 계층의 확장과 함께 하며 유럽 각국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같은 민족이라면 다 같이 힘을 합쳐서 나라를 건설하자."는 민족주의가 그럴듯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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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nation의 개념이 당시에 유행하던사이비 과학인사회진화론,우생학,인종차별 등과 결합하면서 혈통적인 민족의 관념이 대두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이제1차 세계대전에서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가 충돌하는 사건 등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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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반도라는 단어는 19세기까지만 해도 굉장히 희귀한 표현이었으나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쇠락한 오스만 제국이 유럽에서 내쫓기고 새로 등장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의 국가들이 각축을 벌이자 발칸이란 용어도 보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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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하나의 국가로 맺어져 로마의 통치를 받던 발칸반도에 나름의 평화를 짓밟는, 지금의 종교적 분쟁의 계기를 낳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동·서로마 분열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태에서도 짚어본 바 있듯이 로마의 분열은 세계사 전체를 뒤흔들어버리는 가장 중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 동·서로마 분열에 따라 발칸반도는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로마를 나누는 분계점이 발칸반도가 된것이다. 그리하여 발칸반도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 각각 다른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된다. 그리고 본의아니게 카톨릭 문화권과 그리스정교 문화권이 부딪히는 접점으로 자리잡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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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발칸반도의 대부분은 차지하는 슬라브족은 7세기 전까지는 야만족으로서 토벌의 대상으로 감히 발칸반도까지 영역을 확장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6세기 말, 비잔틴의 유스티아누스 1세 집권시기부터 이들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어 슬금슬금 발칸반도 내에 정착하게 된다. 발칸반도에 또하나의 시련의 씨앗이 뿌려지는 순간이다. 유스티아누스 1세는 당시 통일된 로마제국이라는 과업에 심취하여 국경관리에 소홀했고, 설상가상으로 패스트의 창궐로 인해 그 당시 병력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런 기회를 틈타 슬라브인(세르비아인)들은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고, 7세기에는 페르시아인들과 함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는 상황까지 만들며 발칸반도에서 그 위세를 떨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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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발칸반도는 기존의 불가르인과 그리스인에 슬라브인이 추가된 민족구성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는 비잔틴제국 하 그리스정교에 서로마 교황청의 포교정책으로 카톨릭이 각축을 벌이는 지역이 된다. 이것만 해도 골치가 썩는데, 여기에 두번째 일대 변혁의 바람이 부니 바로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성립이다.1000년여의 긴 역사를 뒤로 하고 비잔틴제국은 쓰러지고 그 틈바구니에서 세력을 키워가던 오스만 투르크제국은 마침내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이스탄불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게 된 것이다. 이슬람세력의 팽창에 대한 방파제로서 천년의 세월동안 유럽을 지켜온 유럽의 최전선 비잔틴 제국이 무너지자, 발칸반도는 자연히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영토로서 새로운 역사를 맞이한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는 빠르게 팽창하기 시작해 1459년 세르비아를 시작으로 보스니아, 펠로폰네소스 반도, 알바니아 등지를 빼앗는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 이제 발칸반도는 투르크민족과 이슬람교가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한다.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은 발칸반도 내 카톨릭들에게 관심이 없었고, 기존의 지배층을 잃은 발칸 민족들은 대부분 문맹인으로 또는 소극적인 피정복민으로 남아 5세기 간 역사적 기록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채 스러져갔다. 이런 일련의 과정속에 발칸반도는 슬라브문화·서유럽 카톨릭문화·동유럽 정교회 그리스도교문화·투르크족의 이슬람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 기존의 헝가리인·그리스인·알바니아인 등에 슬라브인(세르비아인)·투르크인이 섞인 아주 복잡한 민족 분포를 가진채 오늘날에 이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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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과정속에 발칸반도는 슬라브문화·서유럽 카톨릭문화·동유럽 정교회 그리스도교문화·투르크족의 이슬람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 기존의 헝가리인·그리스인·알바니아인 등에 슬라브인(세르비아인)·투르크인이 섞인 아주 복잡한 민족 분포를 가진채 오늘날에 이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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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과정속에 발칸반도는 슬라브문화·서유럽 카톨릭문화·동유럽 정교회 그리스도교문화·투르크족의 이슬람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 기존의 헝가리인·그리스인·알바니아인 등에 슬라브인(세르비아인)·투르크인이 섞인 아주 복잡한 민족 분포를 가진채 오늘날에 이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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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련의 과정속에 발칸반도는 슬라브문화·서유럽 카톨릭문화·동유럽 정교회 그리스도교문화·투르크족의 이슬람문화가 공존하는 문화적 다양성 속에 기존의 헝가리인·그리스인·알바니아인 등에 슬라브인(세르비아인)·투르크인이 섞인 아주 복잡한 민족 분포를 가진채 오늘날에 이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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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혁명으로부터 시작하여 민족과 문화적 정체성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한 발칸반도는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이 발칸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에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얼지않는 항구, 부동항을 얻기위한 러시아의 몸부림은 차츰 오스만 제국을 압박해왔고, 이런 러시아의 남하에 압박을 느낀 오스트리아측은 오스만 제국과 손잡고 러시아 축출을 위해 힘쓴다. 이 과정에서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지역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기존 오스트리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며 민족주의적 범슬라브주의, We are the one을 외치면서 러시아를 끌어들이려 한다. 이런 러시아의 지원하에 세르비아 중심의 발칸반도 연합군은 약해진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벌이는데 이것이제1차 발칸전쟁(1912)이다. 전쟁은 연합군 승리로 끝나나, 다시금 그들간의 영토분쟁이 벌어지며제2차 발칸전쟁(1913)이 발발한다. 2차 전쟁에서 승리한 세르비아는 영토확장을 꾀하나 오스트리아의 방해로 실패하고 이제 유럽은 오스트리아 중심 연합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와 발칸반도 중심의 범세르비아주의의 대결로 치닫는다. 그리고 세르비아 청년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암살사건이 촉매제가 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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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잠재적인 위협과 위기감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국가들 간에 교섭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불가리아 - 세르비아가 주 축이 된 이유 : 팽창주의 노선을 걷는 국가, 슬라브 민족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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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잠재적인 위협과 위기감을 느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영토를 확보하려 했기 때문에, 국가들 간에 교섭의 움직임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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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아는 점령하고 있었던 오드린(현 터키의 에디르네)까지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겼으며, 오스만 제국은 더 치고 올라와 불가리아 남부의 트라키야 지방까지 회복했다. 그 뒤로도 불가리아는 연전연패하여 강화를 신청했고, 결국 1913년 7월 30일부터부쿠레슈티에서 회담을 한 끝에, 8월 10일에 평화 협정을 조인했다(부쿠레슈티 조약). 이 조약으로 불가리아는 루마니아에게 도브루짜를 할양했고, 그리스와 세르비아에게 마케도니아 지방을 넘겼으며, 카발라 시(현 그리스령)를 오스만 제국에 넘겨 주었다. 결국 불가리아는 제1차 발칸전쟁에서 얻은 영토를몽땅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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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차 발칸전쟁의 결과,러시아 제국의 외교정책은 말 그대로개발살이 났다. 발칸 동맹의 형성을 추진하고 협조했던 국가는 러시아였다. 하지만 발칸 전쟁이 모두 종결된 시점에서 발칸 동맹의 일원인 국가들이 적대관계로 돌아섰기 때문에 동맹은 당연히 해체되었고, 발칸 동맹을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삼으려 했던 러시아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거기에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관계도 틀어졌다. 불가리아의 공격적인 태도에 질려버린 러시아는 발칸 전쟁이 일어나자 친세르비아 태도로 일관했고, 2차 발칸전쟁에서 불가리아와 세르비아가 적대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세르비아의 뒤를 봐주던 러시아와는 당연히 관계가 악화되었다. 이렇게 되자 불가리아는 반세르비아 교두보라는 가치를 강조하며삼국 동맹에 접근하는 과거의 외교 방식으로 회귀했다. 이러한 전개가 되자 세르비아는 발칸 반도에서 고립된 상태였기 때문에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때 러시아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가장 큰 문제는 1913년 이후였다. 발칸반도는 러시아에게 매우 큰 의미가 있었고, 그 지역에서 영향을 줄 수 있는 마지막 수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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