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한국교회 Ⅱ (1945-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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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교회사’발제문 (2014.05.13)
해방 후 한국교회 Ⅱ
(1945-1960)
-목차-
1. 한국교회의 분열
1) 장로교회의 분열
2) 감리교회의 분열과 통합
3) 성결교회의 분열
4) 침례교회의 분열과 재통합
2. 다양한 교단의 한국선교
3. 분열의 주요 동기가 된 WCC와 ICCC 관계
1. 한국교회의 분열
1) 장로교회의 분열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에 예수교장로회 고려파, 1953년에 기독교장로교(기장), 1959년에 예수교장로회의 통합과 합동이 분열되었다. 한국교회가 교회일치의 전통을 보여주지 못하고, 교회 분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 점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신학적 명분이나 교리의 수호만큼 하나 된 교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음이 한국교회사는 여실히 보여준다. 장로교회의 분열에는 지역성이 깊이 관여되어 있다. 즉 호주 선교부가 관할했던 경남을 중심으로 고신이 분열했고, 캐나다 선교부가 관할했던 함경도를 중심으로 기장이 분열했다. 통합은 북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 인사들(평안도)이 주축이 되었고, 합동은 서북지역에서 열세에 있던 황해도 인사들이 호남지역 인사들과 연대한 측면이 있다. 곧 한국의 교파분열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 안에는 지역갈등, 교권 갈등이 깊이 내재되어 있었다는 뜻이다.
고신의 분열
고신파의 분열의 명분에는 신사참배 반대, 교회의 순결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는 고신을 주도했던 세력이 신사참배를 반대한 이들이었다는 뜻이다. 장로교회는 1938년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여 신앙의 순수성을 저버렸다. 그러나 해방 후 20여 명이 출옥하였는데, 신사참배 반대자들은 경남노회에 특히 많았다. 해방 직후 장로교에는 경기노회 산하의 조선신학교만이 운영되었는데 이 신학교는 신사참배를 허용했고 신학적으로도 개방적 색채를 띠었다. 갈등의 골은 조선신학교에 반대하여 부산에 세운 고려신학교(1946) 문제와 얽히면서 깊어져갔다.
경남노회의 교권은 신사참배자들에게 있었으나 대부분 성도들은 출옥성도의 지도력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경남노회 안에서 부일세력이 다시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교려신학교 인준은 총회의 소관이라고 선언하고 신학교의 학생추천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이런 갈등이 반복되면서 1948년 경남노회는 한상동 목사 등 고신 측과 김길창 측(경남노회)로 분열되었다. 1949년 양측은 각자의 총대 명단을 총회에 제출하였으나 총회는 기존 경남노회의 대표성을 인정했다. 1951년 부산에서 속개된 총회는 경남노회 측 총대를 받기를 가결하자 이에 고신 측은 1952년 따로 경남법통노회를 구성하여 분열하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김익진전인수. 『쉽게 읽는 한국교회사』. 서울: 그리스도대학교 출판국, 2013.
박보경안승오『현대선교학 개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의 역사 Ⅲ』. 서울: 한국기독교 역사연구소, 2013.
정병준. 『세계교회협의회(WCC)를 향한 비판의 근거에 대한 역사적 고찰』. 인터넷 네이버 블로그
검색 http://jbjoon63.blog.me/30151111709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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