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중엄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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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양루기의 작가와 작품 배경
* 범중엄(范仲淹; 989~1052)의 생애
- 북송 시기의 명재상으로 당대의 인재였다. 자가 희문(希文). 강서성 소주 오현(지금의 강소성 오현) 출신으로, 송태종 단공 2년인 989년에 태어나 황후 4년인 1052년에 죽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당 왕조에서 재상을 지낸 두이빙의 후손이고, 아버지 범용(范墉)은 영무군 절도사 밑에서 서기를 지낸 적이 있다. 2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재혼한 어머니 슬하에서 아주 가난하게 성장했다. 어찌나 가난했던지 억새풀로 땅에 글씨를 써가면서 공부했다고 알려져 있다. 계부의 박대도 심해서 13살 되던 해에 예천사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관계(官界)에 발을 내디뎠다. 그 때가 대중상부 7년인 1014년 가을과 이듬해 봄이었다. 천희 5년인 1021년 범중엄은 태주 해릉 서계진(지금의 강소성 동태현 부근)에 있는 염창의 감독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탁월한 치정 능력을 발휘하여 방조제로 인한 문제를 짚어내고 대대적인 제방 공사를 벌여서 시정에 성공했다. 이후 황실도서의 교감과 정리를 책임지는 비각교리에 추천받아 황제를 자주 접견할 기회를 가지고 당시 황제이던 인종이 스무 살이 넘은 성년임에도 여전히 모친인 유태후의 간섭이 심한 상황을 알게 되었다. 이 일로 상소를 올려 결국 하중부 통판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유태후 사후 다시 인종의 부름을 받아 언관 자리인 우사관을 맡아 유태후에 대한 악언을 근절시키게 하였고, 재난 지역을 순시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계속했다. 그러나 재상 여이간(呂夷簡) 파와 곽황후의 폐립 문제를 두고 대립하여 또다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강회로 보낸다는 내용의 조서를 받은 것이다. 목주에서 다시 소주로 전근가면서 그는 또 치수에 공을 세워서 천장각시제의 작위를 받고 개봉부지부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다시 실세를 잡고 있던 여이간파와 치열하게 대립해 또 유배를 보내지게 되었다. 하지만 범중엄은 그렇다고 조정에 염증을 느껴 나라를 외면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가 문무겸비의 인재로 현재까지 추앙받는데에는 52세의 노신(老身)으로 변방에서 무훈을 세웠기 때문이다, 당시 서하는 송이 청일염의 전매제를 도입함에 따라 소금 무역의 길이 막히자 이에 반감을 가지고 송에 대항하게 되었다. 그런데다가 이원호가 서하의 제위에 오르자 형세가 다급해져서 자주 국경에서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때 범중엄이 몸소 출정하여 송나라 군대 체계를 개편하고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공으로 다시 나라의 부름을 받아 추밀부사(樞密副使)가 되고, 이어서 참지정사(參知政事: 부재상)가 되어 그 유명한 경력신정(慶歷新政)을 단행했으나 다시 반대파의 저항에 막혀서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결국 이후에 중앙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지방관으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는 문무를 겸비한 명관으로 현재에도 중국 공산당 간부의 존경과 흠모를 한 몸에 받고 있으며, 저작으로는 범문정공집24권이 남아 있다. 송 대의 선비 의 기풍을 확립시킨 이로 유명하며, 구양수 등과 더불어 고문의 문체를 주장하였다. 정치적으로 그가 실패한 이유는 화합을 도모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반대파와 매번 당파 싸움을 벌인 것으로 보아 합당한 것 같다. 그의 정적이었던 여이간은 간신이 아니라 송초반의 4대 명상(名相)으로 꼽히는 인물 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더욱 그렇다.
*일화-맥주(麥舟)(‘보리배’란 뜻으로 범중엄의 큰 아들이 강남으로 내려가서 돌아올 때 형편이 어려운 벗을 만나 가지고 오던 보리를 배에서 전부 다 내려 주었다는 데에서 유래. 어려울 때 인정을 베푼다는 의미로 후대에 와서 고사성어의 하나로 종종 사용하게 됨), 선우후락(先憂後樂)(악양루기의 명구로 백성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고 일신의 안위는 뒤로 미룬다는 뜻.)
*유명한 사적인 일화- 범중엄이 뜻을 펴기 전 마을의 유명한 관상가를 찾아갔다. 그래서 관상가에게 묻길, “내가 정승이 될 수 있겠소?” 라고 하니 관상가는 흘끗 보고는 “당신 얼굴로는 정승까지는 어림도 없겠소이다.” 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범중엄은 다시 그러면 의원이 될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관상가가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정승하겠다던 사람이 어째 이번엔 의원 노릇을 묻는 거요?” 이에 범중엄은 “내가 정승이 되고자 함은 이 나라의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하고 싶어서요. 그런데 되지 못한다니 이번엔 천하의 백성을 병마라는 고통에서라도 해방시켜 주고 싶어서 그리 물은 것이요. 고통에서 백성을 구한다는 것은 정승이나 의원이나 매한가지니 나에게는 그 직위란 의미가 없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관상가는 무릎을 치며 그를 자세히 보고는 뜻밖의 말을 했다. “거참! 당신은 정승이 되겠습니다. 틀림없는 정승의 재목이요!” 이 말에 놀란 범중엄이 아까와 왜 평가가 다르냐고 물었다. 그러자 관상가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고 한다. “관상은 얼굴을 보는 것이긴 하지만, 그 으뜸은 심상(心象)을 정확히 헤아리는 것입니다. 당신은 분명히 외모만 보면 정승의 재목이 아닙니다만, 천하 백성을 생각하고 품는 마음은 정승을 맡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제가 다시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결국 범중엄은 후대에까지 이름을 남기는 명재상이 되었다.
* 작가의 시대적 배경
송(宋)대 인종. 북송 시기의 번성기로 과거제가 안정되어 지식인 계층이 활발하게 정계로 진출하던 때였다. 청백리로 유명한 포증의 활약 시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범중엄 같은 경우는 포증의 전대에 임용되어 부패한 국정의 쇄신을 위해서 힘썼던 인물이나, 안타깝게도 그의 개혁은 반대파에 밀려서 좌초되었다. 당시 송은 4대째 임금인 인종의 시기에 이르러 과거제도의 안정과 초반 전란의 축소로 경제가 호황기를 누리고 있었고, 관료세계가 어느 정도 기반을 잡았으며, 놀이 문화도 크게 발달해서 화본 소설 등이 등장했던 유례없는 문화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4대째에 이르러서 관료계의 비대화와 문치(文治)주의는 어느 정도 그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부패하고 정적인 관료계의 흐름이 그것이었다. 이 때문에 송나라 곳곳에서 서민의 부담이 가중되었고, 마침내는 수도의 질서도 원칙이 흔들리면서 어지럽게 되는 등(포증이 개봉부지윤으로 임명된 이유가 바로 이것을 바로잡을 필요성을 황제인 인종이 강하게 느꼈기 때문임) 사회 문제가 나타났고, 범중엄은 일찍이 이런 사실을 알고 차후에 일어날 망국의 일을 막기 위해서 나름대로 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다. 결국 초기의 경력신정이 반발에 밀려 실패로 돌아가면서, 송은 적절한 자체 정화의 시기를 놓치게 된다. 그 후 이종 다음의 신종 때에 왕안석을 기용해서 신법개혁을 단행하나, 이마저 종래의 기득권인 보수층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치고 개혁 자체의 문제점으로 말미암아 송은 국력 약화의 길로 접어든다.
#왕안석은 중국의 유명한 개혁가로서 범중엄의 후배이다. 초반에는 범중엄과 막역한 사이인 구양수의 칭찬과 추천을 받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범중엄 말년에 왕안석이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데, 왕안석의 신법개혁의 내용에 범중엄은 반대하였고 그래서 또 유배되었다. 동시대 개혁가의 아이러니이며, 여러 번 실의를 겪은 범중엄이 나이가 들면서 초기의 기세가 꺾인 것이라는 역사가의 평가가 있는데, 이것이 타당한 것 같다.
*악양루기의 배경
이 작품은 그가 같은 정치적 실패의 아픔을 지닌 지방관인 친구 등자경의 부탁을 받고서 악양루에 올라 그 감상을 적은 것이다. 고금을 통해 가장 걸출한 문장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의를 여러 번 겪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좌절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이 글에서는 작가의 정치적인 포부가 잘 드러나 있다. ‘선우후락(先憂後樂)은 이후에 동양의 정치 지도자들이 가장 즐겨서 인용하는 말이 되었다. 문학적인 배경으로 그의 문장을 보면 수사가 그리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송나라 초기의 문학적인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 범중엄과 친한 구양수를 보면 알 수 있지만, 당시 초반의 사대부들은 문장에 수사가 많고 화려한 미적인 가치를 배격하고 정신적이고 유학적인 가치를 추구하였다. 사실 범중엄이 활약하던 초반에만 해도 당시의 상류층에서는 아름다운 시문이 유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육조 시대의 탐미주의적이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가진 것이므로 좋지 못하다고 뜻있는 문사들은 생각했고, 범중엄과 구양수, 한기 등이 그런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소박한 고문(古文)체를 더 가치 있게 보았는데, 범중엄도 이런 가치관을 가진 문인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들은 유학의 경서를 중시하였고, 당대와 육조 시대에 유행한 도가, 불가 사상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문장은 사람에게 직접 실용(實用)이 있고, 정신 수양에 도움을 주는 쪽으로 가야한다고 여겼다. 이와 같은 성향을 지닌 작가는 따라서 경서에 무척 밝았으며 특히 역경에 능했다고 전한다. 감상문인 악양루기가 선우후락과 같은 명언을 남긴 것도 우연이 아닌 것이다.
#악양루
:고래로부터 그 경치로 두보, 이백 등 수많은 문인들이 즐겨 찾는 누각. 원래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수군을 단련시키기 위한 열군루를 토대로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당대에 와서 현재의 명칭인 악양루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청대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북으로 장강을, 동으로 동정호를 임하고 있어 매우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무한의 황학루, 남창의 등왕각과 더불어 강남의 3대 명루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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