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청자의 모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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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청자의 모든 것을 설명해 보자!!!!!
<치명적인 오류>
고려청자란?
한국의 도자기는 고려 건국 초인 10세기에 비로소 자리가 잡혔다. 토기가 주류를 이루던 삼국시대나 통일신라로 이어져오는 가운데서도 7세기경부터 연유계 시유도기(鉛釉系施釉陶器), 회유계 경질시유도기(灰釉系硬質施釉陶器)의 오랜 전통이 있었다.
이러한 바탕이 고려자기가 발달하는 터전이 되었다. 국내의 자체적인 노력과 발전도 있었지만, 중국 도자기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3~4세기경의 청자의 조형(祖形)이라고 일컬어지는 고월자(古越瓷), 당나라 말기의 정요(定窯)에서 제작된 백자, 저장성[浙江省] 북쪽에 있는 웨저우요[越州窯]에서 만든 오대(五代) 때의 세련된 청자, 베이징 부근의 정요백자(定窯白瓷)와 양쯔강[揚子江] 하구 남쪽의 웨저우요 청자들이 한국으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고려자기라면 흔히 청자를 연상하게 된다. 그것이 고려시대 귀족들의 기호에 맞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백자는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지만 그 수효가 적어서 현존하는 것은 많지 않다.
청자란 철분이 조금 섞인 흙으로 그릇을 빚은 후 철분이 1 ~ 3% 함유된 장석유를 바르고 섭씨 1,250 ~ 1,300도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구워 유약 속의 철분이 청록색으로 변한 자기를 말한다.
청자의 발생
청자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얘기가 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발표한것과 일본인들이 발표한것에는 차이가 있지만, 대략 11세기 들어서 본격적으로 만들었다고 발표하고 있다.
1962년부터 국립박물관에서 우리나라 도자기 가마터에 대한 전반적인 조사를 시작하여 청자 가마에 대한 조사도 20년 이상 계속하고 있다. 그 결과 전남 강진군 대구면 일대의 청자 가마터 조사, 인천시 북구 경서동 녹청자 가마터에 대한 조사 등의 연구 진척으로 초기 청자를 새로운 시작에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여러 조사가 진행되어 우리의 초기 청자 발생에 대한 새로운 근거를 가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남해안에는 초기 청자 가마가 많다. 그 대표적인 가마는 전남 강진군 대구면과 칠량면 일대에 있으며 이밖에 평안남도 강서군 잉차면 이리 사기동, 황해남도 봉천군 원산리,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 원흥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경기도 시흥시 방산동,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충남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충남 보령시 천북면 사호리, 전북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전북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전남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등이다.
이들 가마에서는 대접과 접시를 위주로 여러 가지 생활 용기를 만들었는데 그 가운데 대접 한 종류의 형태와 굽 모양이 중국 절강성 동북부에서 번조되는 월주요의 청자 대접과 거의 같다는 데 시점을 맞추어 본 것이다. 이 대접의 형태는 측사면이 직선으로 뻗고 굽다리가 낮고 그 바닥면이 넓다. 또한 굽고 난 다음에 잘 떨어지도록 그릇과 도지미사이에 내화토눈을 받쳐서 번조하였다.
중국 쪽 보고서에 의하면 위와 같은 소위 햇무리굽 대접 등은 8세기부터 번조하기 시작하여 10세기 전번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일본에서는 그때 이러한 햇무리굽 청자를 수입하여 사용하였으며 일부 그릇을 토기로 방제한 것도 대략 10세기 중엽까지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에서도 중국 월주요청자의 햇무리굽 대접과 거의 똑같은 청자 대접을 후대에 만들었을 이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로서도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100년 뒤에 같은 것을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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