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몽고 전쟁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고려 - 몽고 전쟁
1. 몽고의 고려침입
몽고족은 본래 유목민으로 요나 금 시대엔 흑룡강 상류인 오논, 캐루렌 양하 사이에서 대체로 요와 금에 예속되어,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12세기말에 철목진이 나와 내외몽고를 통일하여, 고려 명종 2년에는 대한의 자리에 올라 성길사한이라 하고 아시아 유럽 양대륙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다. 이에 앞서 거란유족이 금에 이반하여 대 요국을 세우고 금의 요동 선무사 포선만노는 자립하여 국호를 대진국이라 하니, 이 두 나라는 몽고에서 축출되어 대진은 동으로 두만강 유역에 와서 국호를 동진이라 개칭하였다. 또 대요의 거란유족이 고려에 들어와 서북의 여러 현들을 약탈하니 몽고는 동진, 고려와 같이 강동성에서 거란 잔적을 토멸하고 말았다. 그 뒤 몽고는 고려와 협약을 맺고 고려는 매년 많은 폐물을 몽고에 주기로 하였다. 그 뒤 고종 12년 정월 몽고 사신 제고여가 압록강을 건너 귀국도중 도적에게 피살되니 몽고는 고려인의 소행으로 오인하여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여러 차례 침략을 받게 되었다.
제1차 침입(고종 18년 8월 ~ 고종 19년 1월)
제2차 침입(고종 19년 8월)
제3차 침입(고종 22년)
제4차 침입(고종 34년 ~ 35년)
제5차 침입(고종 39년)
제6차 침입(고종 42년 ~ 46년)
이 6차에 걸친 29년간의 전투에서 고종 22년의 3차 침입 때와 고종 24년에 있은 6차 침입 때 제일 전화가 심했다. 고려에서는 다년간의 전쟁으로 인하여 국력이 완전히 쇠퇴하여 할 수 없이 몽장 차라대의 본영에 사자를 보내어 철군을 간청하였던 것인데, 이때 차라대는 고려 국왕이 강화도에서 나와 회견할 것과 왕태자의 입조(入朝)를 강경히 요구하였다.
이러던 중 고종 44년(1257)에 권신 최항이 죽고 그의 아들 의가 집권하였다가 이듬해인 고종 45년에 반대파 김준 등에게 피살되니 여기에 4대 16 여 년간의 최 씨의 무단독재정치는 완전히 종언을 고하게 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이와 같은 국내의 정치적 변환을 계기로 하여 종래의 대몽정책에도 변환을 가져와 차츰 몽고에 대해서 화평적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려 조정에서는 몽고에 대한 강화를 지연시킨 모든 책임을 항전파인 무신 최 씨 일파에게 돌리기로 하고, 드디어 태자의 입조를 결정하게 되었고, 고종 46년 3월에 사자 박희실 등은 개경의 몽군 본영에 가서 적장 차라대와 회견하고 국왕의 개경 환도와 태자의 입조를 약속하였으며, 이 해 4월에 고려태자는 이세재 등 수행원 40인을 이끌고 몽고로 항하였다. 따라서 몽고 정부에서는 사자를 고려에 보내어 강도의 성곽을 훼손케 하였으니, 이 뒤 고려에 있어서의 몽고의 군사권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어 갔던 것이다. 고종 46년 왕이 강도에서 돌아감에 태자가 이듬 해 2월에 귀국하여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원종이다.
최 씨 일파를 숙청한 김준은 원종 9년 무신 임연 일파에게 피살되었으며, 정권을 잡으려는 임연은 몽고에 대하여 적의를 나타냄으로써, 원종 10년에 친원책을 강행하려는 원종을 폐하고 경안공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몽고로부터 돌아오는 원종의 태자 심은 중도에서 국내의 정변을 알아차리고 다시 몽고로 돌아가 임연의 죄를 물어줄 것을 청하였다. 이러한 호기를 포착한 몽고는 고려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임연을 위협하고 원종을 복위시켰다. 그 뒤 원종은 몽고로 갔다가 돌아와 환도령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 강화파는 강력한 몽고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개경환도를 추진해왔으나, 원종 폐위에 실패한 임연 일파는 본토 귀환을 맹렬히 반대하여 몽고에 대한 적극적인 항거를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 임연이 병사하고 그 아들 유무가 이어 받아 항거책을 계속해 왔으나 홍문계, 송송례 등이 이끈 삼별초에게 희생되고 말았다.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고려의 대몽항쟁(對蒙抗爭)
  • 고려의 대몽항쟁(對蒙抗爭) 목 차시 대 상 황2고려와 몽고의 전쟁3항복, 그리고 강화4삼별초의 항쟁과 성격 규명5맺음말56머 리 말11. 머 리 말13C 칭기즈 칸이 주변 정주국가 통일몽고족의 흥기  여러 나라에 막대한 영향고려 = 큰 변화를 겪던 시기몽고 군과의 전쟁  1-7차 대몽항쟁기2. 시 대 상 황칭기즈 칸의 서방원정옷치긴의 감국(과도한 공물)포선만노의 반발( 동맹의 요구)고려의 거절3. 고려와 몽고의 전쟁1) 몽고 사신 피살

  • 무신정권 해체기의 정치과정
  • 몽고의 침략에 대한 고려의 항쟁은 고종(高宗)18년(1231)에 시작되어 고종 46(1259)년까지 약 30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전개되었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최씨정권이었고 이들은 적극적인 항전을 내세우며 몽고와의 전쟁을 주도하였다. 처음 고려가 몽고와 관계를 맺은 것은 고종 6년(1219) 강동성에서 거란족을 함께 섬멸한 직후의 일로, 이 때 통교의 조건으로 합의된 것은 고려가 몽고에 세공을 납부한다는 것이었다. 세공을 납부한다는 것은 고려에 비해 몽

  • 중세의 정치 - 고려의 성립, 민족의 재통일, 태조의 정책, 광종의 개혁정치,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무신 정권의 성립,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 고려의 멸망
  • 중세의 정치목차1. 중세의 세계2.1 고려의 성립과 민족의 재통일2.2 태조의 정책2.3 광종의 개혁 정치2.4 유교적 정치 질서의 강화3.1 중앙 정치 조직3.2 지방 행정 조직의 정비3.3 군역 제도와 군사 조직3.4 관리 등용 제도 4.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 4.2 이자겸의 난과 서경 천도 운동4.3 무신 정권의 성립5.1 거란의 침입과 격퇴5.2 여진 정벌과 9성 개척5.3 몽고와의 전쟁 6.1 원의 내정 간섭 6.2 공민왕 때의 개혁 정치6.3 신진 사대부의 성장6.4 고려의

  • [한국중세사회] 대몽항쟁과 삼별초
  • 몽고와의 전쟁(1) 배경(2) 제1차 침입(3) 강화천도와 제2차 침입(4) 제3차 침입■ 팔만대장경■황룡사 9층 목탑(5) 제4차 침입(6) 제5차 침입(7) 제6차 침입(8) 제7차 침입(9) 몽고침략의 영향(개경환도)3. 삼별초의 항쟁1) 삼별초의 성립2) 진도항쟁3) 탐라도항쟁4) 삼별초의 성격5) 삼별초의 의의4.논쟁(1) 강화천도 항쟁인가? 도피인가?(2) 삼별초의 투쟁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가?Ⅲ.결론Ⅳ.참고문헌Ⅰ. 서 론 13세기의 고려(高麗)는 내외적으로 커

  • 전쟁과 대중문화
  • 전쟁과 대중문화1.몽고와의 전쟁근대에 앞서 전쟁과 대중문화를 연관지어 생각 할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몽고풍이다. 고려의 대몽 항쟁과 원의 간섭기를 거치면서 몽고의 많은 풍습들이 고려로 전해졌는데 그것이 몽고풍이다. 명절 때 친지를 방문하고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든지, 조상의 초상을 모시고 향을 피우며 음식을 바친다든지, 혼례를 치르며 연지 곤지를 찍는 풍습이 전해졌다. 또한 식당에서 신선로를 사용 등이 전해졌고, 수렵에

오늘 본 자료 더보기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 최근 판매 자료
    저작권 관련 사항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진실성에 대하여 레포트샵은 보증하지 아니하며, 해당 정보 및 게시물의 저작권과 기타 법적 책임은 자료 등록자에게 있습니다. 위 정보 및 게시물 내용의 불법적 이용, 무단 전재·배포는 금지됩니다. 저작권침해, 명예훼손 등 분쟁요소 발견시 고객센터에 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