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항쟁기 지배층과 민의 항전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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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릿말
Ⅱ. 대몽항쟁의 배경
Ⅲ. 지배층의 항전자세
Ⅳ. 민의 항전자세
Ⅴ. 삼별초의 항전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Ⅰ. 머릿말
13세기 몽골의 침략은 30년이 넘는 장기간에 걸쳐 계속됐다는 점에서, 또한 그 상대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한 몽골족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아왔고 또한 그 무신정권을 중심으로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이민족 침략에 맞서 싸운 총력안보의 성공적 사례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왔다.
그러나 일반인이 지배층에 저항하고, 수탈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몽골군을 환영하고 항복하는 사례들을 봤을 때 과연 계층 간의 단결로 몽골에 맞서 싸웠다고 볼 수 있을까? 또한 12세기 후반은 지배층의 토지탈점과 가혹한 수탈에 의한 민의 저항의 시대였다. 이런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의 첨예한 대립관계가 어떻게 수십 년 만에 해결될 수 있었을까?
이러한 의문점으로 볼 때 대몽항쟁은 단순히 대동단결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거시적 측면이 아닌, 고려의 지배계급, 피지배계급, 그리고 특수집단인 삼별초 이 셋의 관계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먼저 고려 집권층과 몽고와의 관계를 통해 당시 몽고와의 전쟁에 대한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서술한 뒤 당시 지배계급인 최씨정권의 특징과 대몽항쟁에서 일어난 문제점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후 대몽항쟁기의 항전자세에서 대립적 성격을 보이는 지배층과 민의 항전 자세를 살펴보고 이를 통해 지배층과 민의 성격을 탐구하고 더 나아가 몽고전쟁 이후 나타나는 삼별초(三別抄) 항전의 의의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Ⅱ. 대몽항쟁의 배경
징키스칸의 진취적인 지도력을 선두로 그 세력을 기하급수적으로 펼치던 몽골은 대륙의 변방지역에 있던 고려에게 끊임없이 조공을 요구하고 국경지역의 약탈을 일삼는다. 그러던 중 몽고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변에서 도적 때에 암살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로 30여 년 동안 장수 살리타를 선두로 침입과 후퇴를 반복하며 고려를 침략한다. 고종 18년(1231년) 장수 살리타의 1차 고려침략 때 몽골군은 수도 개경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당시의 실권자 최우는 사신을 보내 강화를 제의한다. 이에 몽고는 다루가치를 개경에 주둔시켜 고려의 내정과 조공에 간섭하는 장치를 마련한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집권하게 된 최우는 일단 몽골과 강화는 하였으나 몽골에 대한 노골적 거부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결국 고종과 함께 강화도로 천도한다. 천도 후 최씨정권은 조공을 끊고 몽골에 대항한다.
참고문헌
임용한(서평자).『몽골전쟁과 최씨정권을 보는 두 가지 시각 : 윤용혁, 「여몽전쟁과 강화도성 연구」(혜안, 2011)와 강재광, 「몽고침입에 대한 최씨정권의 외교적 대응」(경인문화사, 2011)의 비교서평 』. 한국역사연구회, 2012

김아네스(서평자).『고려 무신정권에 관한 총체적 연구』.한국중세사연구, 2010

윤용혁.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의 대몽항전자세 (對蒙抗戰姿勢) 』.사총, 1977

신안식, 『대몽항쟁기 민의 동향』, 역사와 현실, 1922

김윤곤, 『강화천도의 배경에 관해서』, 대구사학, 1978

민헌구, 『고려의 대몽항쟁과 대장경』, 한국학론총, 1978

한국역사연구회. 『한국역사입문②』, 『농민항쟁의 전개와 성격』 풀빛, 1995

김윤곤, 『강화천도의 배경에 관해서』, 대구사학,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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