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지로 유명한 허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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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승지로 유명한 하남성
2009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한국 유학생 모두 함께 河南省으로 여행을 가게 되었다. 8시간 정도 달려 도착한 鄭洲는 지금 지내고 있는 荊州市보다 발전이 많이 된 도시 같았다. 鄭洲에는 다른 지역보다 무술학교가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7~8살 정도밖에 안돼 보이는 어린학생들을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조사해보니 그 어린학생들의 부모가 일하느라 바빠서 돌볼 시간이 없기 때문에 무술학교에 보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학비가 싸다고 한다. 이런 곳은 1년에 人民비로 3000원이고, 비싼 곳은 8000원까지 한다고 한다. 어린나이에 부모들과 떨어져 생활하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다른 한편으론 씩씩한 모습에 대견스러웠다.
여행의 첫 번째 목적지였던 少林寺는 중국 湖北省 등봉市 嵩山에 위치한 사찰이다. 듣기에 달마가 少林寺에 와서 도적들을 피하기 위해 무술을 발전시켰다고 한다. 少林寺의 학생 수는 약 8000여명이라 한다. 도착했을 때 수많은 훈련생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관광객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수업에 집중하였다. 다행히도 少林寺의 훈련시간은 3시경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다행히 우리는 훈련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가 본 少林寺의 풍경이 영화 속과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활기보다는 고요함이 느껴졌다. 몇몇의 훌륭한 훈련생들의 공연을 관람할 수 있었는데 武術의 매력에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塔林을 볼 수 있었다. 탑림은 少林寺 출신 고승들의 사리탑을 모아놓은 일종의 공동묘지로 탑들이 숲처럼 빽빽하게 들어서 있어서 塔林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한때는 600여개를 헤아렸지만 현재 남아있는 것은 232개뿐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로 少林寺에 위대한 고승들이 많다는 것과 少林寺의 역사를 알 수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수, 당대에 세워진 것 들이라고 하니 적어도 14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사리탑의 높이가 각각 다른 이유는 고승의 몸에서 나온 사리 숫자에 따라 지어졌기 때문에 큰 탑 일수록 사리가 많이 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少林寺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을 느꼈던 건 역사 깊은 少林寺가 상업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느낀 것 이다. 공연을 관람하는 것, 少林寺 훈련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돈을 지불해야 했다. 한편으론 그것으로 훈련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뿌듯한 마음이 들 텐데 다른 한편으론 너무 어린 훈련생들이 少林寺에서 지내면서 관광객들을 상업적인 수단으로 느끼지 않았으면 한다.
둘째 날, 龍門石窟로 향하였다. 안타깝게도 이곳 유산들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淸日戰爭, 阿片戰爭, 文化大革命 때 많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日本, 美國, 英國, 法國 등의 나라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많은 역사 유물들이 전쟁과 혼란한 사회상황으로 인해 부서지고 사라졌는데 中國 또한 마찬가지 이었다.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후손에게 전해줄 만한 역사적인 유물들이 인간의 욕심으로 인해 보존되지 못하는 현실은 안타까웠다.
龍門石窟의 입장에서 가장 먼저 나타나는 石窟은 바로 빈양三洞이였다. 北魏時代 石窟의 대표작으로 빈양삼동, 빈양중동, 빈양북동의 3개 석굴이 있다. 가장 오랜 기간 건설한 石窟로도 이름이 높은데 그 건설기간만 24년, 동원된 인부만 해도 80만 명이라고 한다. 万佛洞은 당나라 시대의 石窟로 15000여개의 작은 불상 조각들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비록 그 크기는 3cm밖에 되지 않지만 불상 표정이 모두 제각각 이라고 하니 얼마나 섬세한 조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워낙 작고 이미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떤 표정들을 짓고 있는지 육안으로 구분하기 힘들었다. 蓮花洞은 北魏時代 石窟로 천장에는 아름다운 연꽃이 조각되어 있었다.
본존불은 6m의 석가모니불인데 역시 얼굴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奉先寺洞은 龍門石窟에서 가장 큰 석굴 사원으로 唐나라 불교 조각의 금자탑이며 중국 石窟의 백미 라는 찬탄을 들을 만큼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奉先寺洞도 비록 여기저기 파괴되었지만 그 아름다움은 여전 했다. 石窟의 한가운데 위치한 노사나불은 龍門石窟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장 17m, 불상귀의 길이만 1.9m에 달하는 거대 불상이다. 이는 측천무후라고 한다. 석불이외에도 옆쪽으로 흐르던 伊河江과 香山은 장관이었다. 멋진 조각상들과 아름답게 흐르는 강과 파랗게 물든 산을 바라보면서 편안함까지 느낄 수 있었다. 香山도 등산하고 싶었지만 시간상 못한 게 참 안타까웠다. 아름다운 龍門石窟은 유네스코에 지정되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흐르고 전쟁들로 인해 훼손되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龍門石窟은 내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을 것 이다.
다음으로 白馬寺로 향하였는데, 白馬寺는 중국 최초의 불교사원으로 후한 때인 68년에 창건 되었다고 한다. 2000년이나 된 고찰 白馬寺지만 내부는 꽤 현대적으로 되어있다. 현존하는 주요 건물들이 대부분 명대의 것인데, 2008년 올림픽에 맞춰 대대적인 현대화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곳의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말의 동상들이 있었는데 귀엽게 느껴졌다.
이날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서 여러 관광지를 갈 수 있었다. 白馬寺 다음으로 炎黃廣場 갔다.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에 띄는 조각상이 있었다. 놀라움을 감추지 못할 정도였다. 크기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炎帝, 黃帝의 석상이었다. 석상의 높이가 106m에 이르고 코 8m, 눈3m로 만들어져 자유의 여신상 크기보다도 8m이 높다고 한다. 산 하나를 통째로 자른 뒤 화강암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쌓아 올렸다고 한다. 석상의 앞쪽으로는 제사를 올리는 향을 피울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향 이외에도 석상의 크기에 맞춰 炎帝와 黃帝가 먹을 수 있는 제사상도 있었다. 이것 또한 높이가 대단했다. 炎帝와 黃帝의 위엄 있고 당당한 모습은 中國 큰 나라를 한꺼번에 손쉽게 정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 번째 날 역시 아침 일찍 출발해 첫 목적지인 淸明上河圓으로 갔다. 이 날은 주말이었기 때문에 여행객들이 무척 많았다. 河南省 開封市에 위치한 淸明上河圓은 중국의 北宋(960년~ 1127년) 시기의 화가 張擇端의 명작 ‘淸明上河圓’을 그대로 재현한 테마파트 이다. 開封은 春秋全國時代의 魏나라, 5代 10國 사대의 양, 秦, 漢, 周 그리고 北宋, 金나라의 수도였던 곳이었다고 한다. 開封의 옛 모습은 당시 인구 160만 명의 南北運河와 東西의 교차로로 中國의 모든 문물이 모여드는 곳 이였다고 한다. 안타까운 점은 北宋이 金나라에 의해 멸망 될 때의 전쟁에서 金나라 장수가 황하의 둑을 터뜨려 開封은 완전히 수몰되었고 도시 전체가 토사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開封 땅 아래에는 수많은 고대 도시들과 유적지들이 잠들어 있으며, 지금도 문화재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고, 새로운 건축물의 건설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에 들어서면 석상이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張擇端 이였다. 공원의 내부 건축물이 모두 宋나라 건축 양식으로 지어졌을 뿐만 아니라, 안내원, 종업원들 모두 宋시대 복장을 입고 있었다. 유명한 연극이 특별무대가 아닌 여행자가 집중된 길가에서 펼쳐져 관람객으로 하여금 시공간을 초월하여 宋나라에 와 있는 듯 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과 사진도 흔쾌히 잘 찍어주어서 기뻤다. 중간에 판매점에서 아무 생각 없이 부채를 구입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張擇端의 淸明上河圓의 그림 이였다. 많이 구입하여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중간 중간 지어진 건물들을 보면서 그림과 똑같이 재현한 것이 신기하면서 흥미로웠다. 또한 이해하기 쉽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현시대에 지어진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멋있고, 예뻐 보이긴 했지만, 고태를 느낄 수 없어 아쉬움 점이 있었다.
현대의 색색의 아름다운 채색도 좋지만, 宋나라 시대만의 특유의 느낌을 느낄 수 없던 것이 아쉬웠다.
다음으로 開封府에 갔었다. 이곳은 우리에게도 친숙한 판관 包靑天을 만날 수 있는 곳 이였다. 包靑天이 관직에 오르면서 공명정대한 정치를 할 것을 다짐하며 새긴 글도 볼 수 있었다. 또한 드라마에서 봤던 包靑天이 판결을 내리던 자리위에는 正大光明이란 글자를 볼 수 있었다. 이곳 바로 앞에는 3개의 작두가 놓여 있었는데 각각 쓰이는 용도가 달랐다고 한다. 용모양의 작두는 황족을, 호랑이 모양의 작두는 관료, 관리를, 개모양의 작두는 평민에게 형벌을 내릴 때 사용했다고 한다. 작두의 어마어마한 크기에 이미 놀랬는데, 그런 날카로운 작두위에 무서운 동물들의 모양을 본 따 만들어 더 위협적이고 보는 것 만 으로도 무섭게 하였다.
실제 包靑天의 키는 163cm밖에 안됐다고 한다. 또 이마엔 반달모양 문신도 없었고, 피부도 백옥같이 하얗다고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였던 包靑天은 다만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처럼 강하고 위대한 인물로 남아 있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한다.
밖으로 나와서는 큰 징과 북을 볼 수 있었는데 억울한 일이 있을 때 그 억울함을 표현하기 위해 여자는 징을 치고, 남자는 북을 쳤다고 한다. 단지 징을 치고 북을 치는 것으로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고 그 억울함을 들어 주었다는 것이 잘 이해가 가진 않지만 包靑天의 성품으로 보면 억울한 백성들의 고민을 잘 들어 주었을 것 같다.
여행하면서 中國은 정말 큰 나라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생활하고 있는 浙江省의 크기는 우리나라보다도 땅이 더 넓다. 그만큼 인구도 더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中國에서 여행을 하려면 이동하는 데만 많은 시간을 소비해야한다. 장거리 여행이 힘들었지만 기회 된다면 다시 한 번 河南으로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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