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중세 농경정착 문명과 유목 이동 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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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 중세 농경정착문명과 유목이동문명
① 농경정착문명과 유목이동문명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삶을 살아 온 형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성을 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길을 개척하며 사는 것이다. 전자는 농경 정착민족이고, 후자는 유목민족이다.
달의 높이에서 지구를 내려다보면 단 하나의 축조물만 보인다고 한다. 중국의 만리장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만리장성은 ‘중국’이라는 토지를 말(馬) 한 마리 들어올 틈도 없이 둘러싸서 막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어마어마한 규모의 성곽은 그 자체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국인들의 엄청난 공포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대한 공포가 중원의 문명인들로 하여금 그렇게 엄청난 방어의식을 드러내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자기의 이익을 조금도 나누어주지 않겠다는 완고한 이기주의에서 발로한 공포이다. 정착문명은 성곽 즉, 지상에 거대한 ‘이익의 칸막이’를 세우는 것이고, 대지를 연속성을 단절시키며, 사회와 사회, 문명과 문명간의 소통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정착문명이 만리장성을 쌓으며 제 이익과 기득권의 보호에 혈안이 되었다면, 반면에 유목이동문명 길을 닦았다. 그것은 만리장성보다 더 소중한 인류의 유산으로 취급하는 ‘실크로드’이다. 실크로드는 유라시아 대륙 한 가운데 초원유목지대에 형성돼 있다. 유목이동문명세계의 인간들에 의해서 마침내 동양과 서양의 소통과 교류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우연이 아니다. 당시의 유목민들은 자신의 삶의 대원칙으로서 이미 확고한 유목이동마인드를 지니고 있었고 그것이 실크로드를 낳은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몽골공화국의 수도 울란바토르에 가면 근교에 돌궐제국을 부흥시킨 명장 톤유쿠크의 비문이 있다. 이 비문에는 당시 유목민이 겪었던 눈물겨운 사연들을 구구절절 기록하면서 다음과 같은 장군의 유훈(遺訓)을 새겨 놓았다.
“성을 쌓고 사는 자는 반드시 망할 것이며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닫힌 사회는 망하고 열린사회만이 영원하리라는 이 말은 글로벌 인터넷티카 시대인 오늘날 영원한 교훈이다.
② 정착문명과 유목이동문명의 차이
정착문명과 유목이동문명은 사회, 정치, 경제 등 제반 분야에서 현격한 차이를 드러낸다. 이 차이는 우리가 극복해야 할 것과 지향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대체로 지리적으로 바닷가가 가까운 곳에서는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고, 내륙 깊숙한 지역에서는 유목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정착민족에게는 관료제도가 발달했지만, 유목민족은 방목 생활을 하고, 동물을 잡아야만 했기 때문에 군사제도가 발달했다.
또한, 정착사회에서는 인문과학이 발달했지만 유목사회에서는 자연과학이 발달했다. 유목민족들이 기술을 숭배하는 경향이 강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정착 민족에게는 소유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나타나는 반면, 유목민족에게는 개인 소유보다는 함께 공유하는 것이 강하게 나타난다. 정착사회에서는 군왕제가 발달하여 왕이 백성 위에 군림하지만, 유목사회에서는 리더를 중심으로 한 봉사정신이 발달한다.
전쟁터에서 보통은 왕이 군대 대열을 뒤따르지만, 예컨대 칭기스칸은 전쟁을 할 때에 자신이 가장 앞장서고 아들들이 그 옆에 따른다. 따라서, 리더를 뽑는데 몇 달이 걸리기도 하였다. 또한, 왕이 아닌 리더이기 때문에 이들은 평생 친구, 평생 동지의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태어난 곳은 달라도 죽는 곳은 같다’는 말을 신조처럼 언약한다. 따라서, 의형제를 맺어 한 명이 죽으면 그 죽은 이의 자식들을 자기 자식으로 삼기도 하는 데, 이렇게 해서 자식이 100명이 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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