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동학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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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동학농민운동
1894년(고종 31년)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대규모 농민운동을 말한다. 이 해가 갑오년이라 하여 갑오농민운동 혹은 갑오농민전쟁이라고도 한다. 이 운동이 가지고 있고 지향하던 변혁적 자세나 운동적 역량이 한국역사에 있어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며 그 후의 역사전개에 있어서도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 동학농민전쟁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을 보면 1, 2, 3 차 교조신원운동을 바탕으로 고부봉기를 일으켜 전주입성에 이르는 동학농민군의 전진적 승리의 단계인 제 1차 기병과 전주화약을 통하여 동학농민군이 지방통치를 이루는 단계, 그리고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여 공주전투를 거치는 단계인 제 2차 기병으로 나눌 수 있다.
(1)교조신원운동 : 신흥종교인 동학은 이러한 정세를 배경으로 급속도로 발전, 단순한 종교적 신앙의 영역을 넘어 농민들의 사상을 뒷받침하고 사회개혁과 외국세력의 배척을 포함한 정치적 세력으로 삼남지방에 급격히 전파되었다. 이에 대해 봉건지층은 동학을 사교로 단정하고 교주 최제우를 사형시키고 신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한다. 그러나 교세는 날로 확장된다. 광범한 계층의 민중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 동학은 때마침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당한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 1892년 제2대 교주 최시형의 통문에 의하여 전라도 삼례도회소에 모인 수천 명의 교인들은 동학에 대한 탄압을 반박하였다. 이에 당시 감사가 폭동을 두려워하여 동학교도의 탄압을 금하는 관문을 발표하자 이에 기세를 올린 교도들은 다시 전국에 통문을 발송하여 중앙정부에 교조신원을 진정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렇게 애초에는 동학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통해 정치운동화하였다가, 점차 사회적 분위기를 타고 민란과 결합하게 되었던 것이다.
(2) 고부농민봉기 : 갑오농민전쟁은 1894년 1월에 일어난 고부민란에서 비롯되었다. 1894년 1월 10일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을 견디지 못한 전봉준 등 고부민중들이 관아를 습격, 점령한 것이다.
-전개과정 : 고부농민들은 1893년 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民狀)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정익서·김도삼 등 농민지도자들은 봉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각 마을의 집강에게 사발통문 본래 ‘주모자가 누구임을 드러내지 않게 하기 위해서, 관계자의 성명을 둥글게 돌려 적은 통문’이란 의미의 보통명사임에도 이제는 ‘고부모의’만을 특정하게 뜻하는 고유명사로 굳어져 있다.
을 돌렸다. 이들은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한다,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한다는 등 행동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됨에 따라 사발통문결의는 보류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 12월, 60여 명의 고부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고부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이듬해 1월 9일 조병갑이 다시 고부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자, 사발통문 결의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이에 1894년 1월 11일 농민군은 고부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만석보 밑에 새로 쌓은 둑을 허물고 거둬들인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정부는 민란수습책으로 고부군수를 새로 임명하여 유화책을 쓰는 한편,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했다. 신임군수 박원명의 회유책으로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다. 또 안핵사 이용태의 잔인무도한 탄압으로 고부민군은 완전해산 하게 된다. 이처럼 고부민란은 아직 국지적인 민란의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보다 확대된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다.
③ 의미와 한계 : 고부봉기 연시 이전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던 수십차려 다른 봉기처럼 국지적인 투쟁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2개월 동안의 지속성을 띄며 동학농민혁명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학을 했다. 이처럼 지속적인 투쟁으로 전개될 수 있었던 것은 전봉준 등과 같은 지도자의 등장과 고부의 향촌자치기구가 농민군과 지도층의 중간기구로서 역할을 함으로써 가능했었다. 그러나 농민들이 쉽게 해산되었던 내부적 갈등, 즉 최고지도부와 중간지도부의 달랐던 목표, 농민들의 미흡한 의식수준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의지가 성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되어 쉽게 해산되었던 것이다.
(3) 1차 농민전쟁 : 고부에서 일어난 농민들이 일단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茂長)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 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倡義文)을 발표했다. 이어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백산에 집결했다. 3월 25일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추대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었다. 이들은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통치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백산! 에서 대오를 편성한 농민군은 4월 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지를 공략했다.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하여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 탐학관리를 비롯한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 2일 홍계훈(洪啓薰)을 양호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다. 그러나 장성의 황룡시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의 선발대는 농민군에게 격파당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길에 올라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 전주성에 입성했다.
(4) 전주화약과 집강소체제
전주성이 점령당했다는 소식에 놀란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 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이에 따라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개혁안을 제시, 이를 받아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이 이에 응하여 6월 10일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진전을 당분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화약 이후 정부의 폐정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자,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전라도 53주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본거를 두고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에 본거를 두고 전라! 좌도를 통할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지방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속과 행정의 말단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서 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 삼정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해나갔다.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양반유생과 이서층들도 참가했으며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등 군사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충청도의 동조세력과 연락을 취하며 북접에 전면적인 호응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 전쟁을 준비해갔다. 한편 전라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경기도 죽산·안성, 경상도 하동·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
(5) 2차 농민전쟁
1894년 6월 21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은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투쟁에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이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리고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세력을 초토화했다.
2.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농민군은 1894년 농민전쟁에서 주객관적인 요인들로 인하여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1894년 농민전쟁은 역사속에서도 패배한 것은 아니며 한국근대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특히 다음과 같은 몇가지의 사실이 그의 큰 역사적 의의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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