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학문 실학 의대 학자 이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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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실용학문(실학)의 대학자
이익(1681~1763)
1.들어가며
조선후기 태동한 실학은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지 못하는 경직된 전통 유학으로부터 현실에 적용하여 실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새로운 학문 방향을 모색한 유학의 한 분파이다. 실학은 이전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완전히 결별한 전혀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유학 속에서 민생을 도모하는 실용성을 찾아낸 당대 유학자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적 고뇌와 노력이 깃든 사상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지식인 각자의 입장으로 인해 몇 개의 분파로 나눠지기는 하나 그들 모두가 추구한 것은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국가와 사회를 만들 것인가에 있었다. 그 중 토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개혁을 꿈 꾼 이익(李瀷 1681~1763)은 많은 제자를 두고 자신의 호를 딴 성호학파를 형성함으로써 후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2.이익의 생애
조선 후기 실학자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子新), 호는 성호(星湖)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이하진(李夏鎭)이며, 어머니는 권씨이다. 아버지가 1680년(숙종 6) 경신환국(庚申換局) 때 평안도 운산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그를 낳았고, 1682년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일찍 홀로되어 어머니와 함께 선산이 있는 경기도 광주 첨성리(瞻星里, 현재 경기도 안산시 성포동)에서 살았으며,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10세까지도 글을 배울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형 이잠(李潛)에게서 글을 배워 25세가 되던 해인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응시하였다가 낙방하였다. 이듬해 형 잠(潛)이 장희빈(張禧嬪)을 두둔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당쟁의 제물로 장살(杖殺)되자 벼슬할 뜻을 버리고 첨성리로 낙향하여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727년 그의 학문이 높다는 명성을 듣고 조정에서 선공감(繕工監) 가감역(假監役)을 제수 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1763년(영조 39) 83세 때 조정에서 노인을 우대하는 예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의 자급(資級)을 내렸으나 그해 세상을 떠났다. 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3.이익의 사상
1)정치면
무계획적인 과거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이익이 정치면에서 중심문제로 삼은 것은 당쟁의 폐단이었다. 이에 이익은 과거제도의 문제점을 개혁하자고 주장하게 된다.
이익은 너무 잦은 과거 시험 때문에 합격자가 너무 많아 붕당이 형성되는 폐단에 대해서는 과거시험을 줄여야 한다고 하였다. 이익은 3년마다 보이는 3년 대비제도를 5년 대비제도로 바꾸어 선발인원을 줄인다면, 벼슬을 하려고 다투는 붕당의 폐해도 사라지리라고 판단하였다. 또한 5년마다 한 번씩 실시하되 매년 과목을 나누어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과거만이 유일한 출세의 등용문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전폐하고 과거 시험 준비에 평생을 소모하는 폐단에 대해서는 추천제를 통해 보완하고자 하였다. 이익은 3년마다 경대부 이상에게 각자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여 어진이를 뽑도록 하고, 주, 군에서도 또 한사람씩을 추천하도록 하면 우수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관리들에 대해서는 진급 증봉(增俸) 출퇴의 기준으로 철저한 고과실시를 제안하였다.
2)경제면
농사를 짓던 경험에서 토지와 농경생산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익은 이를 중심으로 한 경제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 근간이 토지제도의 개혁이었다. 그는 한전론을 통해 개인의 소유할 수 있는 토지를 한정하여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균등하게 토지를 소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빈부의 양극화를 막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농가마다 가질 수 있는 일정 정도의 토지를 정하고 그 토지는 매매할 수 없도록 하며그 이상의 토지를 매매할 때는 관에 보고하도록 하면 점차로 토지의 배분이 균등해 질 것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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