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순사건의 왜곡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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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의 왜곡보도
여순사건 당시 한국언론의 심각한 왜곡보도 중 하나가 여수지역 학생들의 반란참가에 대한 과장보도였다. 대다수 언론은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받아 "홍안의 여학생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죽창 혹은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무려 남녀학생의 80%가 반란군에 가담해 싸웠다는 설이 현지에서 유포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참(慘)! 반역도(反逆徒)의 비인귀행(非人鬼行)! 반란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는 1948년 당시 신문보도. 대다수 한국언론은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 보도하기에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정부보다 한술 더 떠 윤색과 작문까지 시도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화의 창조(?)에는 특히 동아일보와 소설가 박종화의 역할이 컸는데, 박종화는 한 지방신문에 실린 기사를 윤색해 전혀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다. 그가 참고한 원작은 동광신문 1948년 11월 2일자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였다.
관군이 여수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조그마한 여학생 하나가 "아저씨!"하고 뛰어나와서 한 병사한테 달려들었는데 그 병사는 인민군에 납치되어 있던 여학생인줄 알고 "걱정 마라! 적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 하고 외치자마자 스카트 밑에 감추었던 권총을 쏘아서 그 병사를 죽인 예가 있다.
이는 격동기면 언제나 세간에 등장하기 마련인 객관적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종화는 이 짧은 기사에 살을 입히고 소설가 특유의 문체로 정리해 다음과 같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창조했다.
공산주의 사상이 한번 머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사람이 지독하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여수 진주에서 생긴 일인데 여학생들이 카빈총을 치마 속에 감추어가지고 우리들 국군장교와 병사들을 유도합니다. 오라버니! 하고 재생의 환희에서 부르짖는 듯 우리들을 환영합니다. 무심코 앞에 갔을 때는 벌써 치마 속에서 팽! 소리가 나며 군인들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깜찍한 일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나이 겨우 열여덟, 열아홉 살 되는 것들입니다. …(중략)… 이러한 여중학생 몇 명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습니다. 그 꼴을 보느라고 너는 총살이다 위협했더니 처음엔 부인을 하며 엉엉 울다가 하나, 둘, 셋 하고 구령을 불러서 정말 총살하는 듯한 모양을 보였더니 인민공화국 만세를 높이 부릅니다.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평시에 학교 교육이 얼마나 민족적인 육성에 등한시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는 노릇이올시다.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공산주의의 이념만을 머리에 집어넣는 공부를 한 셈이올시다.
이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는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순사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일반 국민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압군과 정부,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이 퍼뜨린 여학생 반란가담의 진상은 1949년 봄 여수군 장학사 오길언이 여수여중에서 열린 여수지역 교원세미나에서 발표한 반란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에 의해 당장 바로잡힌 바 있다.
오 장학사는 항간에서 떠돌고 있는 이 소문이 사실무근의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문교부의 지시를 받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재를 확인해 보았는데, 조사한 결과 여학생 가운데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총을 들고 가담했다면 죽거나 군 당국에 처형당하거나 군법회의에 넘어갔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병기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학생들이, 그것도 여학생이 정규군과 맞서 일사불란하게 싸웠다는 말 자체가 우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진압군은 이들의 저항을 조직적이고 극렬한 저항으로 묘사했지만, 실상은 진압군의 공격을 죽창이나 총으로 방어하는 데 급급한 비조직이고 무모한 저항일 뿐이었고, 그나마 대다수는 진압군이 몰려오자 모두 뿔뿔이 도망쳤다는 것이 김계유(여수지역 향토사학자), 반충남(전 동아일보 주재기자) 등 현지주민들의 증언에서 확인된 바 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1948년 10월 23일과 24일에 있었던 정부군의 1차, 2차 여수 진압작전이 반란군의 매복과 기습으로 패배로 끝난 것에 대한 군사적 책임을 면피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그 화풀이로 진행된, 여수시민 전체를 적(敵)으로 규정한 진압작전에서 발생한 엄청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가상의 악마를 설정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승만이 정적제거를 하기 위해 여순사건을 이용했음을 추측하게 해주는 글을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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