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분신사건과 동일방직 사건

  • 등록일 / 수정일
  • 페이지 / 형식
  • 자료평가
  • 구매가격
  • 2016.04.16 / 2016.04.16
  • 3페이지 / fileicon hwp (아래아한글2002)
  • 평가한 분이 없습니다. (구매금액의 3%지급)
  • 800원
다운로드장바구니
Naver Naver로그인 Kakao Kakao로그인
최대 20페이지까지 미리보기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자료평가하면 구매금액의 3%지급!
이전큰이미지 다음큰이미지
본문내용
전태일 분신사건과 동일방직 사건
1. 전태일 분신사건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앞길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한 젊은 노동자가 죽어갔다는 것일 뿐이다. 한국사회에서 한 노동자의 죽음은 전혀 중요한 사건이 되지 않는다. 외국의 연예인의 사소한 사생활은 하나의 사건으로 신문에 실릴지 모르지만, 노동자가 죽어가는 일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다. 당시 직업병에 많은 젊은 사람들이 죽어가도 세상은 이에 눈 하나 깜짝 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태일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판자촌은 전전하며 살았던 그 스스로 표현한 ‘밑바닥 인생’이였지만, 온몸을 불태우며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며 죽어간 그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졌고, 세상에 충격을 주었으며 큰 파문을 일으켜 간다.
전태일. 그는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앞에서도 언급한적 있지만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죽는 순간까지 그의 말 그대로 밑바닥 인생이었다. 그는 1964년 봄에 당시 16세의 나이에 서울 평화시장 내에 있는 삼일사에 견습공으로 취직하게 된다.
여기서 당시 평화시장의 노동환경에 대해 언급하자면,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시 평화시장, 동화시장, 통일상가와 근접 건물들을 합친 작업장의 총 숫자는 약 800개 였으며, 여기에서 근무하고 있는 노동자는 2만여 명에 달하였다. 이 3개 시장은 당시 전국 규모의 각종 기성복 공급시장으로서 확고한 상권을 잡아가고 있었는데 1970년 전국 기성복 수요의 약 70%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당시 노동시간은 작업량이 비교적 많은 기간은 보통 아침 8시 반 출근에 밤 11시 퇴근으로 하루 평균 14~15시간이었고, 일거리가 밀릴 때는 어린 시다공들에게 각성제를 투여하면서 사흘씩 연거푸 밤낮으로 이라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그들의 작업장은 원래 1층 높이를 가운데를 갈라 다락방형식으로 만들어 좁은 작업장의 공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고 한다. 또한 재단사 전원이 신경성 소화불량, 만성위장병, 신경통, 기타 병의 환자. 미싱사의 90%가 신경통환자. 위장병, 신경성 소화불량, 폐병 2기까지 평화시장 종업원 중 경력 5년 이상 된 사람은 전부 환자이며 특히 신경성 위장병, 신경통, 류머티즘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작업환경에서 노동운동에 대한 생각이 그에겐 싹트고 있었는데 그는 노동운동에 관한 일로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도중에 우연히 근로기준법의 존재와 내용에 대해 알게 되고, 근로기준법을 공부하면서 그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펼치고자 하며 당시 세 시장의 재단사들을 모아서 바보회를 조직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 실태에 대한 설문조사 등 바보회에서 추진했던 일들은 업주들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전태일은 더 이상 평화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 후 막노동판을 전전한 전태일은 1970년 9월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와 삼동친목회를 만들어 동료들과 함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노력은 계속했다. 그러나 당국과 업주의 방해공작은 더욱 거세졌고 11월 13일 평화시장에서의 데모 계획이 경찰들과 경비원들에 의해 막히게 되자 오후 2시경 석유를 온몸에 끼얹고 나타난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책을 손에 쥔 채로 불을 붙여 분신을 하게 된다. 이 후에 바로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어머니 이소선 앞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러한 전태일이 죽음으로의 항거에는 언론의 외면도 한 몫을 담당했다. 전태일은 바보회를 만들고 노동청에 진정서를 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전태일은 언론에 투고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몇 차례의 걸친 노력은 모두 수포로 돌아 가게 된다. 이러던 도중 전태일은 10월 6일 노동청장 앞으로 ‘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근로개선 진정서’를 제출하였는데, 뜻밖에도 이것을 노동청 출입기자가 10월 7일 경향신무에 보도하였다. 이에 전태일과 그의 동료들은 크게 고무하였지만, 노동청과 기업주는 관심을 보이는 척하더니 곧 외면하였고, 오히려 경찰들까지 가세하여 노동자들을 더욱 통제하려 하였다. 1-월 24일 대대적인 데모를 계획했으나 경찰의 방해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러한 여러 차례에 결친 좌절들이 전태일의 분신 결심에 큰 부분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이때를 시발점으로 하여 정치, 사회 정세는 격동을 하기 시작했다. 동아일보 1971년 신년호는, 한국전쟁이 1950년대를 상징하듯, 전태일의 죽음은 1970년대의 한국문제를 상징하는 가장 뜻 깊은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전태일의 죽음은 학생들을 크게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다. 학생들은 경제성장의 영광 뒤에 숨겨져 있던 한국 사회의 심각한 문제를 발견했다. 그것은 학생들이 정치적 쟁점들에 사로잡혀서 관심을 기울이지 않던 문제였다. 그가 죽은 지 사흘째 되던 날, 1970년 11월 16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는 학생 100여명이 모임을 갖고 가칭 ‘민권수호학생연맹 준비위원회’를 발족 전태일의 시신을 인수해 서울법대 학생장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겠다고 하였다. 또한 이어 서울대 대생들의 집회와 단식투쟁,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등 많은 대학교에서 항의 집회가 열렸고, 서울대학교는 무기한 휴교령이 떨어지게 된다. 또한 종교계도 추도예배를 갖는 등 전국 각지의 학생들과 각처의 종교단체들에 확산되어 학생들이 겨울방학에 들어갈 무렵까지 계속되었고, 이때 결집된 학생들과 종교계 인사들의 각성과 투쟁은 1970년대의 박정희 정권 비판세력으로 그대로 연결. 성장 하였다.
또한 전태일의 죽음으로부터 일주일 후인 11월 21일, 당시의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은 전태일 사건에 관련하여 성명을 발표, “현 정권의 반 근로자적 노동정책에 대하여 항의 한다고 하여 전태일 사건의 정치문제화가 시작되었다.
전태일의 분신자살 사건은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본격적인 노동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1970년 11월 25일 조선호텔 이상찬의 분신 기도, 1971년 2월 한국회관 김차호의 분신 기도, 8월 신진자동차 노조 900여 조합원과 가족 천여명의 대규모 파업 농성 여러 노동운동이 잇달아 일어나게 되었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전태일이 조직햇던 삼동 친목회 회원들과 함께 남한에서는 처음으로 민주적 노조인 청계피복노조를 설립하여 정권과 업주들의 방해에도 이 후 계속적인 노동운동을 이어나가게 된다. 1971년에 일어난 노동 분규 사건은 1656건을 헤아렸는데, 이는 전년도의 165건의 10배가 넘는 것이었다.
2. 동일방직 사건
인천에 위치한 동일방직에는 전체 1300명의 노동자중 천명이상이 여성 노동자였다. 이들은 1972년 한국 최초로 여자지부장을 선출하여 모범적인 민주노조를 만들었다. 이에 회사 측은 1975년 말부터 이 노조를 와해시킬 목적으로 남자 대의원들을 동원하여 어용노조화를 시도 하였다. 이에 여성노동자들은 이러한 회사측에 반대하여 단호히 맞섰는데, 1977년 7월 25일 농성 노동자들을 강제 진압하기 위하여 경찰들이 투입되었다. 여기에 여성 노동자들은 알몸으로 저항하였는데 경찰은 알몸으로 저항하는 여성 노동자들을 덮쳐 72명의 여성노동자들을 체포해 연행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투쟁을 전개해 나갔는데 1978년 2월 노조 대의원 선거에서는 투표장에 들어서는 여성노동자들에게 회사 측에 매수된 남성노동자 4명이 분뇨를 뿌리며 폭행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1. 조영래 / 전태일 평전 / 돌배게
2. 강준만 /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편 1,2,3권 / 인물과 사상사
3. 구혜근 /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 / 창작과 비평사
4. 이효재 / 한국의 여성운동:어제와 오늘 / 정우사
자료평가
    아직 평가한 내용이 없습니다.
회원 추천자료
  • 사회과학 7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
  • 70년대 민주화 운동과 노동운동① 70년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 박정희 정권과 민주화 운동70년대의 시대상황② 70년대 노동운동 1. 박정희 정권의 노동 정치 2. 70년대 노동운동의 양상과 성격 3. 70년대의 대표적 노동운동(1) 전태일 분신 자살 사건(2) 동일방직(3) YH무역사건과 부마항쟁(4) 원풍 모방③ 결 론 - 70년대 노동운동의 평가④ 토 론- 경제발전과 노동인권- 경제발전과 노동조합의 필요성① 70년대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박정

  • 2023년 1학기 여성의삶과문화 기말시험 핵심체크
  • [사회복지발달사] 근로 복지 발달사
  • 전태일은 스스로의 경험과 동료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 나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름대로 여러 방법을 시도해 보았다. 전태일은 정부기관에 진정도 해보고 언론에 호고도 해보았으나 돌아오는 것은 해고뿐이었다. 몇몇 친구들과 뜻을 모아 몇 차례 가두시위도 시도했으나 경찰의 봉쇄로 빈번이 무산되었다. 거듭된 실패에 좌절한 그는 마침내 이 억울한 현실을 모든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분신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을

  • 1910년대 독립운동, 1920년대 청년운동, 1930년대 재일조선인운동, 1940년대 통일운동, 1950년대 소극장운동, 1960년대, 1970년대 노동운동, 1980년대 민주화운동, 1990년대 여성평화운동, 2000년대 정보인권운동
  • 사건이 상징하듯이, 정보사회로의 인프라 구축이 어느 정도 완료되었다. 둘째, 1996년 전자주민카드 반대 운동 이래 몇몇 정보운동 단체를 중심으로 축적되어온 프라이버시에 대한 문제의식이, NEIS를 계기로 전체 사회운동으로 확산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사회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기업이 정보화 프로젝트를 마구잡이로 추진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프라이버시 운동 진영은 2003년 내내 “프라이버시를

  • [역사]전태일과 한국의 노동운동
  • 사건이며, 그 이후로도 이러한 양상은 계속 되풀이되고 있다. Ⅴ. 전태일의 노동운동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가끔 우리는 노동자들이나 민주 운동가들의 분신 자살이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되지만, 그리 큰 감흥이나 느낌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전태일이라는 한 노동자의 죽음에 주목하게 되는 것일까. 우리는 그의 죽음을 전태일 당시와 이후, 그리고 오늘의 현실에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전태

사업자등록번호 220-06-55095 대표.신현웅 주소.서울시 서초구 방배로10길 18, 402호 대표전화.02-539-9392
개인정보책임자.박정아 통신판매업신고번호 제2017-서울서초-1806호 이메일 help@reportshop.co.kr
copyright (c) 2003 reoprtshop. steel All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