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2세기로 마의 동방 속 주정 책과 그리스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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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양 고대사 Report>>
기원전 2세기 로마의 동방속주정책과 그리스의 자유
Ⅰ. 머리말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의 국가조직은 포에니 전쟁(Punic War)을 기점으로 크게 복잡해진다. 제 1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64~241)의 결과로 로마는 시칠리아 섬을 획득하게 된다. 이는 로마가 지중해세계를 통합하여 대제국으로 팽창하는 첫 걸음이었다. 로마는 이탈리아를 통일할 때와는 다르게 새로 획득한 시칠리아를 동맹국으로 취급하지 않고 속주(Province)로 만들어 생산물의 1/10을 공납으로 징수하였다. 제 2차 포에니전쟁이 시작될 때까지 로마는 사르데냐와 코르시카를 획득하여 사르데냐, 코르시카 이 두 섬은 기원전 231년 하나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속주로 만들고, 북부 갈리아인(Gallia Cisalpina 알프스 쪽의 갈리아라는 뜻.
)을 평정하였다.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9, p 105
제 2차 포에니전쟁에서 승리한 후 로마는 지중해 서부를 장악하자마자 동방 쪽 절반에 대해서도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그로써 공화정의 해외 속주는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이 조약의 내용에서 필리포스는 그리스인들의 자유와 독립을 승인하고, 에게 해, 일리리아, 그리스에 있는 자신의 모든 주둔군을 철수시키기로 한다. 이로 인해 마케도니아로부터 그리스인들은 독립하게 되었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196년 7월 코린토스에서 열린 이스트미아(Isthmian) 경기에 플라미니누스가 경기장에 참석하여 로마 원로원의 이름으로 그리스 국가들에 대해 약속된 자유와 독립을 선언한다. 여기서,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승리로 인해 마케도니아뿐만 아니라 그리스 국가들의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한 로마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그리스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선언한 것은 지금의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로마는 제 1, 2차 포에니전쟁 전후로 새로운 속주들을 편입하기 시작했다. 그 연장으로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삼을 수 있었는데, 로마는 그러지 않았다. 물론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의 속주화, 기원전 146년 아케아 전쟁의 결과로 헬레니즘 세계의 정치적 자유가 종식되었다. 하지만 약 50년 동안의 그리스의 자유는 사뭇 다른 속주들과 다르기에 이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 먼저 포에니 전쟁 前, 後로 달라진 로마의 속주정책, 다음으로 기원전 2세기 로마의 동방의 상황과 제 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며, 그리고 그리스의 자유가 갖는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포에니전쟁 前, 後의 로마의 대외정책
기원전 3세기 말에 이르러 로마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속주들을 통제하고 통치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다. 로마는 일찍이 라틴 공동체와 동맹의 관계를 맺고 단순히 동맹의 맹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라틴 공동체는 이론상으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공동체는 달랐다. 로마는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의 지원이 절실하였기 때문에, 피루스(Pyrrhus) 기원전 319~272년, 에피루스의 왕으로 마케도니아로부터 에피루스 독립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진력하였다.
의 침입 무렵 기원전 280년에 타렌툼을 구원하기 위하여 이탈리아에 원정 떠난 것.
부터 그리스 공동체와 가장 호의적인 조건의 동맹들을 맺기 시작하였다. 이 동맹들은 그리스인들의 감정을 고려하여 이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일정 수의 선박을 로마의 처분 하에 둠으로써 상호 군사 지원이라는 Foedus(동맹)의 중심 개념을 유지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제 1차 포에니 전쟁이후 로마가 시실리에 대해 취한 조처는 기존의 대외 관계로부터의 이탈을 보여준다. 우선 세공을 납부하는 예속지를 얻었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동맹관계의 출현이라는 점에서도 변화가 나타났다. 신미숙, 「기원전 2세기 로마의 동방정책과 “그리스인의 自由”」,『西洋古代史硏究』, 1993, p 91
당시 키케로가 행한 연설문을 보면 시칠리아 섬의 처리방식에 관해 추측이 가능하다.
“¨¨¨우리는 시실리의 도시들이 과거와 동일한 법적 지위를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시실리 도시들에 대한 주권을 수락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무력에 의해 점령되었고, 따라서 그들의 토지가 로마의 공유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토지는 전 주인들에게 되돌려 졌다. 이 땅을 임대하는 일은 로마인 켄소르(Censor)들 로마제국에서 재산 및 호구조사, 풍기단속 등의 일을 맡아 본 감찰관(監察官).
참고문헌
Ⅵ. 참고문헌
프리츠 하이켈하임 저, 김덕수 역, 『로마사』, 현대지성사, 2004.
플루타르크 저, 이원수 역, 『플루타르크英雄傳 3』, 을서문화사, 1980.
Henry C. Boren 저, 이석우 역, 『서양고대의 역사와 문화』, 탐구당, 1999.
Sidney Painter 저, 고려대학교 대학원 서양고대사 연구실 역, 『西洋古代世界史』, 고려대학교 출판부, 1987.
민석홍, 『서양사개론』, 삼영사, 2006.
E. S. Gruen, 「Studies in Greek Culture and Roman Policy」, 『Cincinnati Classical Studies』 n.s.7, Leiden-New York: Brill, 1990.
신미숙, 「기원전 2세기 로마의 동방정책과 “그리스인의 自由”」, 『西洋古代史硏究』제 1집,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1993
신미숙,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원인」, 『서양사론』제51호, 한국서양사학회, 1996.
조현미, 「헬레니즘 시대의 지배자 숭배 :발전과정과 의미를 중심으로」, 『서양고대사연구』제24집,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2009.
차전환, 「로마 제국의 중앙과 지방」, 『서양사론』제86호, 한국서양사학회,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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