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 선생님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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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김구선생님의 사상
고전적 민족주의
백범 김구 사상은 고전적 민족주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역사적 견지에서는 전근대적이었다고 하는 편이 오히려 적절하겠으나 굳이 고전적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그의 사상이 구 시대적이면서도 중국의 항일 투쟁에서나 8.15후의 국토분단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나 그 민족노선이 이승만과는 달리 냉전의 물결에 편승하지 않고 오로지 민족의 자주와 통일을 위해, 즉 민족의 이익을 위해 생애를 바쳤다는 그 순수성 때문에 고전적이라는 표현이 보다 더 적절한 것 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민족 사상은 누구보다도 순수했고 또 누구나 느끼는 바이겠지만 서민적(庶民的)이라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그의 민족 사상을 민주적이라 하지 않고 굳이 서민적이라 하는 것은 단재 신채호의 경우처럼 항일투쟁에 있어서 주체로서의 민중의 역사적 임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한 점에서이다. 김구는 민중을 자기가 구원해야 할 객체라 보았을 뿐 민중이야말로 항일투쟁전선에 있어서 스스로를 해방시킬 주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민중의,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이라는 철학을 그가 겪은 시대적 여건 속에서는 인식하기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 민중의 한 사람이었으면서도 민중에 의한에 대한 인식에 투철하지 못했다. 오히려 일종의 메시아적 사명감에서 자신을 희생시킬 생각이 앞섰다. 통일을 위해 38선을 베개 삼아 죽을 각오라는 그의 말 속에 이러한 메시아적 사명감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이같이 김구의 민족사상이 서민적이기는 했으면서도 서민에 의한사상, 즉 민주주의에는 투철하지 못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 그의 사상을 민주적이라 하기는 어렵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의 민족 사상은 새로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정부수립후 30년간 망각의 시대를 거쳐 민중의 차원에서 다시 그의 민족 사상이 새로운 연구과제로 제기된 것은 냉전의 시대가 지나고 바야흐로 통일의 시대가 찾아왔다는 역사적 단계와 관련이 없지 않다고 본다. 민족 통일 없이는 5천만 민족의 고난, 즉 동족상잔의 새로운 위기, 끝없는 경제적 고통, 정치적 수난, 민족 문화의 오염 등을 도저히 없겠다는 민족적 자각,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모든 문제들이 오로지 통일의 달성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점차 깨닫게 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김구는 가난과 거듭되는 역경에서 제대로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으며 자기 사상을 이론화. 체계화할 처지가 못되었고 게다가 보다 더 행동인으로서의 생활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사색에 잠기며 자기 철학을 심화시킬만한 환경이 못 되었다. 따라서 일반적 의미에서 그의 민족 사상을 탐구하려 한다면 다소의 어려움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김구의 민족 사상을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성장 과정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김구가 정치의식에 눈뜨게 된 것은 자기가 상민이라는 신분을 뼈저리게 느낀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아버지가 하찮은 양반들로부터도 천대를 받고 반항적 행각을 하는 것을 본 경험 또는 자기 자신 천대를 받고 후에는 혼담도 이런 이유 저런 이유로 5, 6차례나 깨어지는 등 하여간 신분적 차별을 느꼈던 것이 그를 분발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양반이 되고자 아버지 이름으로 대신 과거를 치르나 물론 급제할 리가 없었고 끝내는 상민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이 김구로 하여금 동학에 가담케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김구는 그러나 동학도로서는 성공하지 못하고 대신 강렬한 민족 자주 사상과 평등사상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 같은 그의 민족 자주사상은 그로 하여금, 이조 양반 사회에 대한 반체제 운동에서 일제 침투 후로는 다시 항일 투쟁에 가담케 했으나 바로 이러한 사상적 과정 속에 그의 민족사상이 근대적 훈련을 받을 기회가 적었는지도 모른다.하여간 그는-국모 살해범 토전의 타살-신민회 가입-애국 계몽 운동- 중국 망명 등으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그의 소박한 서민적 애국심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안명근 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 있을 때 김구는 감옥사의 소제를 , "내 나라가 서면 정부 청사의 문지기가 되어도 영광"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 후 김구는 상해 임시 정부 때 임시 정부 청사의 수위가 되겠다고 자청해 임정요인들을 감동시켰으나 20대의 새파란 청년들도 차관이다 대의원이다 하는 판에 40이 훨씬 넘은 나이에 어떻게 수위로 있을 수 있겠느냐는 안창호의 요청으로 경무국장이 되었다. 경무 국장 시절 그의 밑에서 경호원으로 있던 청년에 조봉암이 되었다. 김구는 경무국장 자리를 5년간 지키면서 일제의 밀정을 잡는데 많은 업적을 세웠다. 가장 천한 자리를 희망해 경무국장이 되었으나 사실은 임정을 지키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김구는 이동령 의정원 의장이 찾아와 국무령이 되어 달라고 했을 때 나 같은 미천한 사람이 어떻게 국가 원수가 될 수 있겠느냐고 국가와 국민의 위신에 큰 관계가 있다고 한사코 사양한 일이 있었다. 김구는 자기가 상민 출신이라 하여 높은 벼슬을 고사한 것인데 이것은 그가 겸손한 때문이요 또 자기 분수에 넘는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된다는, 보기에 따라서는 출세욕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볼 수도 있다. 대통령 아니면 절대 수락할 수 없다고 왕자연 한 이승만하고는 본질적으로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
김구는 자기 호를 백범(白凡)이라 이름지었는데 이것은 백정이나 범인과 같은 미천한 사람들과 자기를 관련시켜 생각한 때문이다. 김구는 상해에서의 생활이나 윤봉길 의사의 거사 후 피신생활을 할 때나 언제나 초라한 옷에 가난한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 가난한 서민의 한 사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김구의 민족 사상이 이승만의 친미 사대적인 것과는 달리 강한 자주성을 보이고 있는 이유가 이런 점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민족에 대한 신념
김구는 한번 품은 사상에는 일편단심 변화가 없었다.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의 민족 사상. 운동에도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 민족을 위해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망명할 정도라면 보통 신념과 의지로서는 불가능하고 상해에 모여든 사람들은 거의 이러한 인사들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 중에서도 김구는 특히 두드러진 사람이었고 그의 이같이 강한 신념은 상해 임정의 간판을 끝까지 고수하여 8.15후 귀국할 때 임정 주석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무엇보다도 그것을 잘 말해준다. 이러한 집념이 없이는 일제하에 항일 독립운동이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김구는 그의 자서전 [백범일지]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애초에 임시정부의 문파수를 지원하였던 것이 경무국장으로, 노동국 총판으로, 내무총장으로 ,국무령으로 , 오를대로 다 올라가 다시 국무위원이 되고 주석이 되었다. 이것은 문파수의 자격이던 내가 진보한 것이 아니라 사람이 없어진 때문이었다. 비기건대 이름났던 대가가 몰락하여 거지의 소굴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 때는 중국인은 물론이오 눈 푸르고 코 높은 영.미. 법 등 외국인도 정청에 찾아오는 일이 있었으나 지금은 서양 사람이라고는 불란서 순포가 경관을 대동하고 사람을 잡으러 오거나 밀린 집세 채근을 오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한창 적에는 천여 명이나 되던 독립운동자가 인제는 수십 명도 못되는 형편이었다.
머지 않아 독립의 서광이 비치리라던 조선의 운명은, 나날이 강해지는 듯이 세력을 뻗쳐 가는 일제의 욱일승천(旭日昇天)과 같은 발전에 독립투사들은 모두 기가 죽고 절망해 김구가 개탄한 바와 같이 이광수,정인과 같은 임정간부들이 일제에 투항, 귀국해 버렸다. 또한 그간 국내 각도 각군에 조직되어 있던 연통제도 발각되어 많은 동지들이 희생되고 게다가 생활난까지 겹쳐 저마다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임정에는 돈도 사람도 모이지 않아 이승만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박은식이 대통령이 되었고 이상룡이 국무령이 되어 서간도부터 상해로 취임하러 왔으나 각원을 고르다가 지원자가 없어서 다시 서간도로 돌아갔다. 다음 홍진이 선임되어 진강으로부터 왔으나 역시 내각조직에 실패하고 되돌아갔다. 이리하여 임정은 한때 정부 없는 상태가 되고 결국 김구가 국무령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의 자신의 생활에 관해 김구는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임시 정부 청사에서 자고 , 밥은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의 집으로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얻어먹었다. 동포의 직업이라야 전차회사의 차표 검사원이 대부분이어서 70명 가량 되었다. 나는 이들의 집으로 다니며 아침 저녁을 빌어 먹는 것이니 거지중에도 상거지였다......
이것이 1920년대 후반기에서 30년대에 걸친 김구의 숨김없는 생활이었다. 그러나 이 정도의 불운에 좌절할 김구는 아니었다.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한 것이 이봉창촵윤봉길 의사의 거사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임정을 떠나도 김구는 변함없이 임정을 고수했다. 그의 평생은 임정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가 귀국 후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앞장서 그토록 반대한 것도 30년 지켜온 3촵1운동의 민족염원을 연합국이
무시한 데 원인이 있었다. 그는 언젠가 귀국 후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도냐 사도냐가 생명이라는 것을 명기하여야 한다. 비록 구절양장(九折羊腸) 일지라도 그 길이 정도라면 그 길을 택하여야 하는 것이오, 우리가 망명 생활을 30여 년간이나 한 것도 가장 비현실적인 길 인줄 알면서도 민족 지상 명령이기 때문에 그 길을 택한 것이다. 과거의 일진회도 현실적인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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