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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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임진왜란
많은 내용으로 인해 길었던 발표가 끝나고 교수님의 동아시아 3국이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관점, 즉, 한국은 반란으로, 일본은 역(정벌)으로, 중국은 원조로 임진왜란을 평가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다. 국사는 분명히 사실이다. 삼국통일도, 몽전항쟁도 사실이다. 임진왜란은 1592년에 분명히 일어났다. 하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이다. 어떠한 입장에서 어떻게 바라보는 가에 따라, 엄연한 사실이 상반되는 평가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세계화를 위해서는 우리의 관점을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하지만, 한가지 사실을 가지고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은 강의시간이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침공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나타낸 것은 1585년경부터였고 1587년에 그는 국내 통일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규슈정벌을 끝마치고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침공의 뜻을 표명하였다.
일본은 내전을 통해 연마한 병법·무예·축성술·해운술 등을 정비하고 조총의 대량생산도 진행되었다. 1592년 4월 13일 경상도 동래부 다대포 응봉봉수대에서는 왜군의 700여 병선이 쓰시마를 출항하여 부산포에 이르고 있다는 상황보고가 곧 경상·전라도의 각 감영과 중앙에 전달되었다.
그러나 경상좌수영군은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궤멸되었고 14일에는 왜군 선발대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약 1만 8000 병력이 부산성을 공격하여 십수시간의 혈전 끝에 부산성을 사수하던 부산진첨사 정발 등의 전사로 성을 빼앗겼다. 이튿날 동래에 진격한 왜군들과 맞선 동래부사 송상현 이하 군민은 끝까지 항전하다 순국하였다.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킨 왜군의 후속부대는 계속 상륙해 와서 4월 18일에는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 2만 2000여 병력이 부산에, 구로다 나가마사가 이끄는 제3군 1만 1000여 병력이 다대포를 거쳐 김해에 상륙, 침공을 개시하였다. 이와 함께 구키 요시다카 ·도도 다카토라 등의 9,000여 수군이 편성되어 바다에서 이들을 응원하였다.
4월 17일 경상좌수사 박홍으로부터 왜군 침공의 급보가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신립을 도순변사, 이일을 순변사, 김여물을 종사관으로 임명하여 왜군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김성일을 경상우도초유사, 김근을 좌도안집사로 삼아 민심수습과 항전을 독려하도록 하였다.
북상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이일에게는 중로인 조령 방면을, 유극량과 변기 등에게는 각기 죽령과 추풍령을 방비하게 하였고 도순변사 신립과 도체찰사 유성룡으로 하여금 이일을 응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일이 4월 24일 상주에서 가토에게 패하여 충주로 물러나자 왜군은 조령과 죽령 등지에서 저항도 받지 않은 채 충주까지 진격하였다.
이일의 뒤를 이은 신립은 충주 탄금대에서 방어작전을 폈으나 패하였다. 이일 등이 죽령·조령·추풍령 등의 요새를 방어하기 위해 출발한 후 조정은 적군의 수도 공격에 대비하여 우의정 이양원을 수성대장으로 삼아 도성의 성곽을 축성하게 하는 한편 전 북병사였던 김명원을 도원수를 삼아 한강을 수비하게 하였다.
신립의 패전보고가 있자 4월 30일 선조는 평양을 향하여 피란길에 오르고 임해군은 함경도로, 순화군은 강원도로 보내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꾀하고자 하였다. 왕의 서천으로 백성들의 사기는 더욱 떨어졌고 특히 하삼도는 무정부적 혼란상태가 더했다. 왕이 피난해 있는 사이 민이 일어나 공사노비의 문적이 있는 장례원과 형조의 건물을 불태우고 경복궁·창덕궁 둥 궁궐과 관청에 들어가 약탈을 하였다.
상륙 20일만에 서울은 왜군에게 점령되었으며 서울에 입성한 왜군은 대오를 정비하여 고니시의 부대는 평안도, 가토의 부대는 함경도, 구로다의 부대는 황해도로 진로를 정하는 한편 서울을 지키는 부대를 두고 경상·강원·전라도 방면으로 진출하여 후방지역을 담당하였다. 강원도·황해도 방면으로 모병하러 간 두 왕자도 왜병의 포로가 되고 파죽지세로 밀려드는 왜군에 의해 개성·평양은 부산 상륙 이후 60일도 못 되어 함락, 거의 무방비상태인 전국토는 함경도까지 진출한 적에게 짓밟히게 되었다.
서울이 함락되고 함경도 지역까지 왜군의 침략을 당하고 있을 때 해상의 싸움은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조선 수군의 편제와 전술은 고려 이래로 왜구 방어 위주였으므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따라서 각도에는 수영이 있어 이를 수군의 근간으로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으로 침입한 왜선단에 경상좌수영과 우수영은 해상에서 제대로 싸움조차 하지 못한 채 패하였다.
전라좌수영의 수군절도사로 있던 이순신은 경상우수영으로부터 왜군의 침입보고를 받자 곧 출동하여, 옥포의 첫 해전에서 승리를 거둔 후 당포·당항포·한산도·부산 등지에서 계속 큰 전과를 거두었고, 특히 한산도 앞바다의 해전을 진주성싸움·행주산성싸움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으로 꼽는다.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한 조선군으로 인해, 해상으로 북진하여 육군과 합세하려던 왜군의 작전은 분쇄되었다. 해상에서의 승리와 함께 육지에서는 부산진·동래의 수성전과 김해성의 저항, 경상우방어사 조경 휘하의 돌격대장 정기룡의 추풍령전투, 밀양 작원에서의 밀양부사 박진의 선전, 유도대장 이양원의 해유령 승전 등 치열한 접전이 있었다.
한편 혼란과 민심의 이산 속에서도 근왕을 부르짖는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였다. 영남에서는 유림 곽재우·김면·정인홍 등이, 호남지방에서는 고경명·김천일, 호서에서는 조헌 등이,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거병하였다.
왕이 파천하는 도중 사신을 명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자 명에서는 조선 땅에서 왜군을 격퇴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파병을 결정하여, 선봉장으로 낙상지와 사대수 등이 먼저 건너오고 이어서 송응창·이여송이 4만 5000의 동정군을 이끌고 조선의 김응서 등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 이를 탈환하였다.
계속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던 명군은 벽제관에서 왜군과 일대 접전이 벌어져 개성으로 퇴각하고 왜군은 서울에 집결하여 함경도에서 철수하는 가토의 군대와 연합, 행주산성을 공격하였다. 행주산성에는 전 전라도순찰사 권율이 이치싸움에서 승리한 후 명의 원군과 호응하여 서울을 탈환하기 위해 웅거하였으나 벽제관싸움에서 명군이 패퇴하자 고립되었다. 권율은 조방장 조경, 승장 처영과 함께 약 2,300의 정병으로 행주산성에서 배수진을 치고 몇 차례의 격전 끝에 왜군을 물리치자 왜군은 다시 서울 이북에 출병하지 않고 서울 철수를 서두르게 되었다.
8월 도요토미가 죽자 이를 계기로 왜군은 총퇴각하였다. 왜군의 가토가 울산의 도산성에서 퇴각하고 순천의 고니시도 퇴각하려 했으나 이순신의 수군이 이를 차단하자 왜의 수군 300여 척이 이를 후원하려 노량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은 명의 수사제독 진린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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