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에 대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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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지금부터 1만년전 신석기시대 초기에 한대륙과 한반도에는 마을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6천년전 즈음 후기 신석기 시대에는 마을연맹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마을연맹체는 아직 국가는 아니었던 듯하며 지도자가 다스리는 정치권력체로서 고을나라인 셈이었다. 그리고 이들 고을나라 중에서는 아사달이 가장 강했고 이들은 훗날 청동무기를 앞세워 정복과 영토확장을 계속하여 서기전 2333년에 조선을 세운다. 곧이어 조선은 숱한 나라와 민족을 포괄하면서 제국을 건설한다.
조선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요수(遼水. 지금의 난하[ 河]. 북경 동쪽)·갈석산(碣石山. 고대의 요서 서부지역. 산동성 북쪽)을 경계로 춘추전국시대·진(秦)·한(漢) 시절의 중국과 접경했고 북쪽으로는 어르구나하(額爾古納河), 동북쪽으로는 약수(弱水.흑수. 흑룡강·아무르강)에 이르렀다. 또한 남쪽으로는 한반도 남해안, 동쪽으로는 일본에 걸치는 것이었다.
특히 조선은 한(漢) 초기에 패수(요수보다 서쪽에 있는 강) 유역까지 확장하여 한족을 몰아내고 국경을 삼으면서 그 영토를 더욱 넓히기도 한다. 또한 조선인들은 BC 3C경에는 청동기·철기·벼농사 등을 가지고 일본으로 가서 야요이(彌生)문화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조선은 이들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 거수국(渠帥國. 제후국가)을 두고 다스렸다.
이들 거수국에는 개마(蓋馬), 구다(句茶), 고구려(高句麗), 고죽(孤竹), 기자조선(箕子朝鮮), 낙랑(樂浪), 맥(貊), 발(發), 부여(扶餘. 동·북 부여가 있었음),비류(沸流), 숙신(肅愼. 읍루[相婁]), 양이(良夷), 양주(楊州), 예(濊), 옥저(沃沮), 유(兪), 임둔(臨屯), 조나(藻那), 주나(朱那), 진(辰), 진번(眞番), 청구(靑丘), 추(追),한(韓. 삼한[三韓]), 해두(海頭), 행인(荇人), 현도 등이 있었다.
당시 조선은 가장 북쪽에 있던 부여에서 가장 남쪽의 한(韓)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최고신으로 받드는 종교와 단군을 최고 통치자로 하는 정치라는 지배구조를 유지한다. 또한 나라나 민족마다 얼마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체로 비슷한 풍속을 유지한다. 그리고 비파형 동검·청동거울·질 그릇·고인돌 등으로 비추어 볼 때 조선이 청동기시대의 주역이자 강대한 힘과 문화의 나라였음을 쉽게 알 수 있기도 하다.
아울러 공납, 군사파견, 법령 등은 조선의 것을 따랐으며 중앙의 명령에는 복종하고 따라야 했다. 다만 거수국에 대해 통치자 거수를 비롯한 독자적 정치조직을 인정하여 지방분권적 통치조직을 근간으로 한다. 당시 거수국 중에서는 요하(遼河) 서쪽에는 고구려·고죽·기자조선·낙랑·맥·발·부여·숙신·양이·양 주·예·옥저·유·임둔·진번·청구·추·현도 등이 있었고,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에는 개마·구다·비류·조나·주라·진·한·해두·행인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서기전 2세기 초 195∼180년 즈음에 위만조선이 영토를 확장해 오면서 난하와 대능하까지의 영토를, 서기전 108∼107년에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漢)이 2차례의 전쟁 끝에 요하지역까지 쳐들어 왔다.
이에 따라 조선의 거수국은 요수지역을 잃으면서 요하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으며 조선도 도읍을 옮기게 된다.
사실 조선은 영토의 변화에 따라 도읍을 여러 차례 옮긴다. 원래 조선은 한대륙 대부분을 확보하게 되자 요녕성 본계시(遼寧省本溪市)지역으로 수도를 옮기고 그곳을 평양성이라 했다. 그리고 또다시 서진하여 영토를 확장하자 요수 동부유역(하북성 천안[河北省 遷安])지역에다 백악산(白岳山) 아사달을 세우고 도읍지로 삼는다. 그러다가 BC 1100년경에는 주(周)에 의해 망한 상(商)왕실의 후예였던 기자가 망명해 오자 요수지역을 맡기고 도읍을 대능하 동부 유역에 있는 북진(北鎭)지역으로 옮기고 장당경(藏唐京)이라 한다. 그후 BC 194년 기자조선의 준(準)이 위만세력에게 패하고 장당경이 위만조선의 국경에 있게 되자 다시 아사달로 옮기다. 특히 청동기술이 각 지역으로 전파되어 거수국들이 강한 무력을 갖게 되고 수차례의 전쟁 중에 철기가 보급되면서 농경지가 확대되고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이전의 통치질서는 붕괴되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조선의 중앙 통치력과 거수장악력이 현저히 약화되면서 열국시대(列國時代)가 오게 된다.
역사학적으로 고조선의 존재를 추적해볼 수 있는 시기는 기원전 10세기경이 한계. 그 이후 고조선 주민들은 족장들의 지도나 지배하에 遼河일대에서 紀元前 3世紀初까지 거주. 기원전 8·7세기경에는 이미 비파형청동검을 비롯한 청동기문화를 누리고. 청동검은 흔히 거친무늬청동거울과 함께 출토. 칼과 거울은 무당이나 사제의 상징적인 소지품들로 보이는 만큼 이 두가지가 같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은 고조선 전반기의 청동문화단계에 지도자 내지 지배자들이 종교적 사제를 겸했음을 보여주고⇒ 제정일치사회(檀君王儉)기원전 4세기 후반 3세기 전반에 고조선은 연나라와의 투쟁에서 실패하여 서쪽의 거점들을 대부분 내어주고 중심지를 평양지역으로 옮겨.→ 연과의 투쟁은 기원전 4세기말부터 시작 『위략』 : 기원전 4세기 말에 전국 7웅의 하나인 연나라가 주의 제후의 입장에서 벗어나 자신을 높히어 왕이라 칭하고 동쪽으로 영토를 넓히고자. 조선의 후도 왕을 자칭하고 병사를 일으켜 연을 치고 주의 왕실을 높이고자. 조선 후의 부하인 대부 禮가 간하여 말리니 그 일을 그만두고 禮를 연에 사신으로 보내어 연을 달래니 연도 침략을 그만두었다. 후에 자손들이 교만하여 포학해져서 연이 장군 진개를 보내어 서방 2천리의 영토를 빼앗았다고. -----이기사는 『염철론』에서는 상실된 땅을 천리로 기술⇒ 정치나 외교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대부라는 관등명이 존재 고정적인 영토가 있었다고 보는데는 문제점이 有. 당시에는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마을을 이루고 서로 점점이 멀리 떨어진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형편. 영역이라는 개념은 확립되지 않은 상태. 이때는 동일 혈연과 동일 문화를 가진 고조선인들이 요하일대에 일종의 연맹을 이루고 살았던 것. 조선후는 연맹장으로서의 직책을 수 행하면서 보다 전문적인 관리가 필요했던 만큼 약간의 관료체제를 마련. 前4세기말의 고조선은 국가단계에 거의 접근위만조선 : 기원전 3세기말 중국은 漢에 의해 재통일 한고조 유방의 이성제후 축출정책에 연왕 盧官이 흉노로 도망. 노관의 부하였던 위만도 조선으로 망명. 조선왕 準은 위만에게 박사의 벼슬을 주고 조선의 서변을 지키도록 명. 위만은 유이민을 끌어모아 준을 축출(前 194년경)하고 위만조선 건국. 위만조선은 한과 삼한·진번·임둔지역을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성. 기원전 109년 한 무제의 조선정벌로 인해 기원전108년 1년가의 전투끝에 멸망. 한은 고조선과 흉노와의 연결가능성을 차단하고 동북아시아지역에 대한 패권을 확립할 필요. 이 위만조선의 시기에는 고조선은 국가의 단계에 진입 ① 위만조선의 구조 : 유이민 + 토착민의 이중구조(朝鮮相 歷谿卿·朝鮮相 路人·尼谿相 參·相 韓陰)→ 적어도 각 집단에 대하여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일정 범위에서 작용하였겠지만, 적어도 각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적이었을 것(ex:역계경은 우거왕에 대한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망명)② 한무제의 5만군사에 대항하여 1년간 버티는 전쟁→ 군사력의 존재가 확인③ 팔조범금 : 살인, 상해, 도둑질에 대한 처벌내용→ 이미 사유재산제가 확립·발전된 농경사회. 그리고 엄격한 사회계급이 있었으며 특히 이러한 법을 집행할 만한 통치기구의 존재를 생각해 볼 수④ 前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바로 한의 郡 3개가 그 지역에 설치된 것도 영토가 있었기에 가능∴ 이시기 사회구성은 일단 귀족·일반민·노비로 대별 가능. 대규모 노비경영의 존재는 확인되고 있지않으며, 노예제 경영이 발달한 사회에서 확안되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도시의 발달이 확인되지 않음※ 요동반도 남단의 旅大市에서 조사된 崗上墓와 樓上墓⇒ 전형적인 순장묘 崗上墓 : 대략 기원전 8-7세기의 무덤으로 약 140여명에 달하는 사람이 순장 樓上墓 : 그보다 조금 늦은 시기의 것으로 100여명의 순장사실이 확인※ 고조선의 강역① 在遼寧說 : 북한학계(지금은 아님)·재야사학자② 在平壤說 : 日人學者·李丙燾 등 및 현재의 북한학계③ 移動說 : 신채호·서영수 등
1. 序論
古朝鮮은 民族史의 源流로서의 인식으로 인하여 역사학자 또는 일반인 모두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오고 있으며, 고조선사 연구중에서도 고조선의 位置와 彊域문제는 항상 논쟁의 초점이 되어 오고 있다. 이러한 관심 때문인지 이 부분에 관한 서적들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러한 책들을 무비판적으로 읽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큰 과오를 범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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