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 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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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안용복, 그는 누구인가}

1.문제제기
안용복.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울릉도, 독도는 우리땅으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얘기가 오르내린다. 그는 평범한 상민이었다. 그는 조선시대의 법을 위반한 죄인이었다. 그의 출생지도, 출생 연도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는 너무나 평범한 조선백성이었다. 어떻게 일개 평민으로서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을 할 수가 있었는가? 독도의 현재는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하등의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왜구 침입 등 의 이유로 울릉도. 독도에 대해 공도정책을 펼쳤던 당시의 상황과 일본과의 외교 마찰로 국민들의 독도 입도를 지극히 제한하는 지금의 상황은 참으로 비슷하다. 안용복의 자취와 당시의 조선조정의 정책을 되짚어 보며,300여년이 지난 오늘의 현명한 독도영유권 대응방침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려 한다.
2.당시의 상황
안용복은 조선 숙종 때 어부였으며 동래부에서 태어난 평범한 상인이었다. 안용복이 살았던 시기는16C~17C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인해 조선 왕조가 울릉도와 독도를 돌볼 여력이 없었다. 이때에 왜구의 노략질이 시작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울릉도에는 조선인들만 밀입 하거나 출어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도 출어하거나 밀입 하여 고기를 잡고 나무를 도벌하는 형편이었다. 이무렵 1614년(광해군 6년) 6월에 대마도주는 조선 동래부에 외교문서를 보내면서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분부로 독도. 울릉도를 탐견 하려고 하니 길 안내를 내어달라 라고 하였다. 비변사의 건의에 따라 울릉도가 조선에 속한 사실이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고, 또한 도민을 소환한 기록도 명백하게 있으므로, 앞으로 이런 일본 측의 같은 시도가 있으면, 이러한 모든 내용과 함께 대마도주에게 강경한 내용의 문서를 주어 막부에 보고하도록 돌려보내고, 울릉도에 일본인의 왕래를 금지하도록 경상감사와 동래부사에게 지시하였다. 이듬해 1615년에도 일본 배 2척이 와서 울릉도의 형지를 탐험하러 간다고 하였지만 동래부사는 강하게 거부한다. 그러나 조선정부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도꾸가와막부는 1618년에 오타니 집안과 무라까와 집안에게 울릉도 도해 면허를 허가해주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은 막부에서 두 사람의 도해를 승인할 때, 두 사람이 막부에 낸 출원서 에는 울릉도가 무인도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었으며, 막부도 그런 이유로 승인했다는 부분이다. 오타니는 1625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오타니의 사망으로 곤란해진 무라까와는 오타니 대신으로 오타니의 숙부인 곡현번의 장남 구우위문에게 맡겨 종전대로 공동사업 방식으로 울릉도 도항을 계속하였지만, 두 사람 모두 무사기질로서 울릉도에서의 지휘에는 게을러서 사업은 제대로 진전이 되지 못하였고 이후 사업이 쇠퇴해지자 두 사람이 격월제로 교대로 울릉도에 건너가 지휘하였다. 그런데 1692년 3월에 무라까와 집안의 배가 울릉도에 도착했을 때 조선 어부들과 사건이 발생하였다. 울릉도에 도착해보니까 30명 정도의 조선인 어부들이 무라까와 집안의 시설장에서 두고 온 도구들을 사용하여 전복을 잡기에 한창이었었다. 그 사건이 10일간이나 끄는 동안에 조선인 어부들은 인원이 70∼80명으로 불어났다고 한다. 결국 숫자에 짓눌린 일본인들은 싸움이 일어나도 이길 수 없음을 판단하고, 요나꼬로 철수하였다. 다음해인 1693년 3월에 무라까와 집안을 대신하여 오타니 집안이 나가게 되었다.1692년의 경우를 생각하여 상당한 준비를 해 가지고 섬에 갔지만, 이번에도 2개월 동안의 교섭에도 불구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여 안용복및 다른 조선일 한명을 강제로 요나꼬에 데리고 왔다.(1차로 건너갔다고 할 수 있다)
3.안용복의 업적
안용복은 1696년 봄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울릉도, 독도를 수호하려고 하였다. 안용복은 1696년 봄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중 뇌헌, 글을 잘 하는 이인성, 사공 유일부, 유봉석, 김길성, 김순립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에 들어갔다. 과연 울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해있으므로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거짓말로 모면하려 하였다. 그러자 안용복은 “송도는 곧 우산도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 고 하느냐”고 꾸짖고 이들을 쫓아냈다. 안용복 등이 이튿날 새벽 배를 타고 우산도에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 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으므로 안용복 등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면서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 모두 배를 타고 돌아갔다고, [숙종실록]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등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일본 혼슈[本州] 시마네현[島根縣]에 딸린 제도)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는 찾아온 이유를 물었고 독도 등의 섬을 조선 땅으로 정하고 관백(벼슬이름)의 문서를 받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일본은 정해진 격식이 없이 또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이에 안용복 등은 분격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네마 현)로 향하였다. 안용복 등은 스스로 울릉도.독도 양도 감세장‘이라고 칭하고 백기주 태수에게 사람을 보내 통고하니, 백기주 태수가 인마를 보내 맞이하였다. 안용복은 전날 두 섬의 일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 도주의)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백기주 태수가 이를 허락하으므로 안용복은 이인성에게 상소문을 지어 관백에게 정납케 하였다. 당시 대마도 신.구 도주는 안용복의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죄를 감추고 있었다. 그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백기주 태수에게 명령하여 써 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 조선 땅 이라는 문서를 빼앗아 없애고 도리어 일본 땅 (울릉도)에 조선 어부들의 침범을 엄금해 달라고 문서를 위조한 죄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역상 조선측이 막부에 보낸 물품의 도량형을 속인 것이다. 이때 마침 대마도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머물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수를 찾아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지 말라고 권고하였고 백기주 태수는 우선 울릉도. 독도를 침범했다가 안용복에게 쫓겨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이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정하여 들여보내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는 약속을 하였다.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고, 파견수행원을 정 하여 호송해 주었으며, 화폐도 가지고 가라고 주었으나 안용복.뇌헌 등은 완강히 사양하고 귀국하였다.
4.왜 일본은 독도를 탐내는가..
㉮ 독도의 일반적인 경제적 가치
㉯ 독도의 군사적 가치
㉰ 독도의 지질학적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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