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혁명 516 군사정변 518 광주 민주화운동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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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4.19 혁명은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정권의 문제에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자신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기위해 3월 15일자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반공개 투표, 야당참관인 축축,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발표 등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 부정선거는 처음엔 국민들이 모르다가 정의감에 불타는 한 경찰관에 의하여 백일하에 폭로되었다.
3.15 분노한 마산 시민들은 사상 최악의 선거를 규탄하는 격렬한 시민봉기가 일어났다. 이에 뜨끔한 이승만 정권을 그들이 공산당이라는 미명하에 총과 칼로 그들을 저지하였다. 완전 억지다. 그러던 11일. 마산시위에서 실종되었던 김주열군의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참혹한 시체로 마산 앞바다에 버려진 것이 발견되자 분노한 시민들은 제2차 의거를 일으킨다.
마산시위에 자극받은 국민들은 하나하나 일어나가 시작했고 4.18일 고려대학생들을 4.19의 혁명에 불을 지피는 시위를 한다. 고대생들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하여 봉화를 높이들자”는 선언문을 낭독하고 “마산사건의 책임자 처벌”을 주장하며 국회의사당까지 진출하였다. 국회의사당 앞까지 갔지만 별다른 정부의 반응이 없자 학교로 돌아가던 고대생들이 청계천 4가 천일국장 옆에서 쇠파이프, 벽돌, 쇠망치, 갈퀴들을 휘두르는 괴청년들의 습격을 받아 피를 흘리며 도로에 쓰러졌다.
깡패들의 데모대 습격이 이승만 정권의 행동이라는 판단을 한 전국의 시민과 학생들은 총궐기하였으며, 시위의 성격도 이제까지의 "부정선거 항의"투쟁에서 이제는 "이승만 하야와 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서울에서는 동국대를 중심으로 한 학생과 시민들이 이승만 대통령과 면담을 요구하며 경무대로 향하던 중 경찰의 무차별 총격을 받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빼앗긴 주권을 되찾으려는 주권자의 정의의 함성을 독재정권은 총칼을 앞세운 무력으로 탄압하였으며, 서울, 부산 등 5개 대도시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였다.
4월 23일, 야당 소속의 장면 부통령은 "권력을 갈취하여 압제와 폭정을 계속하는 이승만 정부에게 경종을 울리고, 자유, 민주의 정신을 소생시키기 위해 부통령직을 떠나 민주투쟁의
전열에서 국민들과 더불어 최후 승리의 날까지 분투할 것"이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4월 24일, 이제 자신들도 위기를 느낀 이승만 정권은 당시 부통령이던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사퇴와 함께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임하는 미봉책을 썼다.
4월 25일, 독재정권의 학살만행에 분노한 서울시내 각대학 교수단 300여명은 "학생들의 궐기는 정의감의 발로이며 불의와 부정에 항거하는 민족정기의 표현이다. 대통령이하 3부요인은 퇴진하라"는 선언문을 채택하고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랜카드를 앞세우고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다시 수많은 학생과 시민들의 항쟁의 불길이 타올랐다. 그러나 집권야욕에 여념이 없던 독재자는 이 시위대에 또다시 총격을 가해 2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4월 26일, 전날에 이어 서울시내를 가득 메운 대규모의 시위군중은 총칼 앞에서도 굽히지 않고 더욱 완강하게 투쟁하였으며, 이승만 독재자는 마침내 굴복하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2.28 대구시위에서 시작된 전 국민적 투쟁에 의해 12년간 독재정권이 막을 내린 민권승리의 날이었다.
개인적으로 부정선거를 폭로한 경찰관이 누구인지 꼭 알고싶다. 이 분도 자신의 행동이 이승만 정권의 막을 내리는 시발점이 될 것을 예측하셨을까? 여하간 이 분 덕분에 국가가 잘못을 고치고 정당하게 바로서야 함을 알려준 것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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