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종교사로서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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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종교사로서 한국사
잃어버린 초월을 찾아서
궁극적인 의미에 대한 전적인 헌신을 종교의 핵이라고 보았을 대 유교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 헌신하는 이상은 성인됨이다. 유가의 길이란 성인과 같은 인간 육성을 통해서 공동체의 삶을 바르게 하고 나라를 올바르게 세우며 나아가서 천하에 화평을 이루고자 하는 길임을 밝혔다. 맹자에서는 성인이 27번 사용되는데 그의 성선의 인성론을 통하여 인간 누구나가 공유하고 있는 모두가 도달 가능한 이상으로 적극적으로 제시되었다. 인가의 성에 대하여 과거 성인들의 본성과 오늘날의 본성이 같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누구라도 요와 순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다. 맹자의 이러한 진심으로의 성인지도 이해는 10세기 이후 도학파들에게 잘 이어졌다. 성인지도의 길은 매우 영적이고 반드시 관계 속에서 자아를 파악하려는 관계성의 영성이며 지금 이곳에서 하늘의 도를 실현하려는 도학적 영성이다. 성인지도의 방법론(경): 퇴계는 천리와 인욕이 뒤섞이고 정의와 권세가 분간할 수없이 혼돈된 것을 보고 그 둘 사이에 구분을 뚜렷이 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위한 핵심적 수행방법으로서 ‘경’을 내세웠다. 효는 ‘하늘의 성품’으로서 천지의 성품은 사람을 제일 귀하게 여기고 사람의 행실은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효도 중에는 부모를 존엄하게 하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성과 경 그리고 효의 세 가지 주제는 조선 도학의 길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고 18세기 여성 성리학자들에게도 같은 역할을 하였다.
*임윤지당: 임윤지당은 함흥 판관을 지낸 아버지 임적과 어머니 파평윤시의 딸로 1721년에 태어낫다. 그녀의 형제 자매들은 모두 5남2녀 였고 집안의 고조부인 임의백은 유명한 사계 문인이었고 아버지는 기호학파의 지도자였던 수암 권상하에게서 배웠다. 이렇듯 집안의 내력이 율곡 계열의 학파에 속하고 윤지당은 어려서부터 돌아가서 아버지를 대신해 오빠 임성주로부터 소학과 사서등 유교 경전과 역사책을 학습하였다. 성장하여 19세 선비 신광유와 결혼하였으니 혼인한지 8년만에 사별하고 28살에 홀로 되었다. 47세에 이미 집안의 큰 어른이 되어 제사를 받들고 손님 접대하고 일가친척을 대하고 모든 가사를 처리하면서도 밤에는 늦게까지 학문에 몰두하는 생활을 하며 자신의 독서와 저술활동을 가무고 드러내지 않았다. 또 윤지당은 결혼후 얻은 아이가 어려서 죽고 그후 시동생의 아들을 입양해서 지극 정성으로 키웟지만 그녀가 40세 때에 죽었다. 50대에도 불행은 계속되어 친정의 형제들 조차 잇따라 죽었고 1788년에도 임성주조차 먼저 가서 매우 비통해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서도 강인한 의지와 심성수양으로 생을 지탱했고 말년에는 독서와 저술에 힘쓰다가 1793년 원주에서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지당은 중국 역사의 인물 중 안연을 가장 좋아했는데 윤지당에 따르면 “성인이란 말은 자신의 도량을 넓혀서 타고난 기질을 변화시킨 사람을 지칭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요순과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자주 인용하였다. 윤지당이 강조한 것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었고 거기에 결코 여성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윤지당은 기질의 차이라든가 역할의 차이보다는 그 역할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적인 원리의 하나 됨에 더 강조점을 두었다. 윤지당에 의해 이해된 예와 덕이란 어떤 기존의 세워진 틀과 원칙을 그저 따르는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진정으로 인간 마음의 근본으로 내려가서 거기서부터 주체적으로 판단하며 행동하는 일이다. 윤지당은 인간의 도보다 하늘과 자연의 도 즉 항상 근본을 중시했다. 이것은 그녀가 결코 바깥의 시선이나 평가에 급급하지 않고 얼마나 진지하게 내면적 진실 앞에서 성실하기를 원했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일이다.
*강정일당: 강정일당은 영조48년 10월15일 충청북도 제천에서 아버지 강재수와 어머니 안동 권씨의 딸로 태어났다. 정일당은 생전 5남4녀를 나았으나 모두 한 살이 되기 전에 죽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러나 생애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세밀한 가계 관리를 통해 어느 정도 살림이 폈다. 1832년 9월 14일 향년 61세로 타계했는데 이웃 사람들이 목놓아 울었고, 문하의 학도들이나 어린 시절 양육으 받았던 사람들 수십명이 가슴에 흰 띠를 두르고 그녀를 위해 곡했다고 전해진다. 정일당은 제사를 받들고 빈객을 접대하고 바느질하며 밥하고 상을 치르며 질병도 간호하는 일 외에 유교13경을 다반사로 여겼고, 여러 진적들에 두루 능통하면서 고금의 정치변동과 인물들의 행적을 손바닥처럼 밝게 알았다고 한다. 도 윤지당보다 50년 후에 태어나서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그녀를 몸시 흠모하여서 “남녀의 품성은 차이가 없고, 여성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윤지당 글의 구절은 일상의 가장 중요한 구절로 삼았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 학문의 목표는 결코 입신양명이 아니었고, 남에게 잘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 속의 천명에 대한 깊은 순종이었고 하늘과 땅에 대한 떳떳함이엇다. 정일당이 자신의 공부방법으로 경에 주목했다는 것은 그녀의 성리학 공부가 더욱 종교적이고 도학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아홉명의 자녀가 모두 일직 죽고 3주야를 굶어도 원망하거나 근심하는 마음이 없이 오히려 그러한 불행을 만날 때마다 남편을 더욱 위로하고 격려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극단적인 환경과 혈육이 전멸하는 비극 속에서도 스스로의 도리를 다할 뿐 결코 명을 탓하지 않고 현실에 맞서서 자기 성실을 다하는 심원한 종교적 수행자의 삶이었다. 당시 정일당은 기호하파의 계열의 학문적 배경에 속해 잇었지만 경을 특히 중시하였고 깊은 종교적 태도로 예에 대한 관심을 보여 주엇다. 여기서 우리는 정일당의 만물 일체의 깊은 영성과 더불어 삶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성의 영역으로 화하게 하려는 깊은 통찰과 사랑의 실천을 볼 수 있다. 정일당은 바로 자신의 삶 자체를 그러한 진리의 실현장으로 보았다.
*문제제기: 유교 전통의 여성들은 제사를 준비하고 이어가면서 지극한 종교심을 드러냈고 가족공동체를 이끌어가면서 신을 모시듯 했다. 일반적으로 이런 극진한 삶의 표현들이야말로 그들의 종교성의 핵심이 된다. 이것은 위대한 어머니의 입장에서도 가능한 부분일 수도 있지 않을까? 분명 남편이 죽고 아이들이 죽는 극한 상황에서 강한 정신력으로 견딘 것은 신앙의 힘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머니의 사랑이 종교성으로 미화된 부분도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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