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중운동과 기독교사] 5 18 광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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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한국 민중운동과 기독교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1.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정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12·12사태를 주도한 신군부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민주화 운동이다.
2.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배경과 전개
5·16군사정변으로 등장한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성장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대외의존적 자본주의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상당한 수준의 공업화를 이룩해낸 반면 여러 방면에서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경제의 대외의존도 심화와 산업부문간 불균형의 결과 농업부문이 황폐화되고 이농현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농촌문제와 도시문제를 동시에 초래했다. 이 과정에서 국가가 주도하는 공업화 위주의 경제성장정책은 민주주의와 국민생존권 문제를 동시에 야기시켰다. 이같은 국가 시책이 사회적 갈등으로 표출되자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체제를 통해 갈등을 억압하고자 했다. 그러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 상황에서 1970년대 말의 세계적 공황은 수출주도형의 우리나라 경제를 심각한 위기국면으로 몰아넣었고, 그 결과 국민의 불만이 증대되었다. 더구나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에 저항해온 학생·종교인·지식인의 민주화운동 역시 끊임없이 유신체제를 위협했다. 야당진영 역시 유신체제에 대항, 반독재 기치를 강화하고 있었으며 1979년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파동을 계기로 제도권 정치영역은 조절능력을 상실했다. 유신체제의 이러한 내적 문제점은 일련의 국민들의 저항을 통해 증폭되어오다가 1979년 10월 16일 부마사태 1979년 10월 16~20일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민주화운동. 이 사건은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을 전국적인 규모의 시위로 확산시켰으며,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체제가 무너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로 표출되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을 심화시켰으며, 결국 10·26사태(박정희 대통령 암살)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광주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된다. 게다가 이 운동이 광주·전남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데는 박정희의 집권기간에 심화되어온 호남의 정치적·경제적 차별, 갑오농민전쟁·광주학생운동 등 광주를 중심으로 한 호남지역의 역사적 경험, 유신체제에 의해 지속적으로 박해를 받으면서도 반독재운동을 계속해온 김대중이라는 지도자의 존재 등 광주를 비롯한 호남지역이 갖는 특수성이 내재되어 있다. 특히 김대중의 구속은 호남대중의 정서를 신군부에 대한 반대로 결집시키는 구체적인 촉매제로 작용했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고 유신체제가 붕괴되면서 한국은 민주화를 향한 정치적 격변의 시기로 접어들었다. 유신체제의 전 기간을 통해 억압받아온 민주주의와 생존권에 대한 열망은 기존의 집권세력을 위협하면서 급격하게 확대되어갔지만, 12·12사태를 계기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심이 된 신군부세력은 최규하 과도정부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국민들이 요구하는 민주주의와 이를 위한 명확한 정치일정 제시를 거부하면서 권력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국민의 저항은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다양하게 표출되다가 사북사태로 대표되는 노동자 생존권의 문제로까지 확산되었다.
특히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시위 등 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신군부세력을 위협하자 신군부세력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발표했다. 집권세력은 그들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분출되는 국민들의 저항에 군사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와 투옥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18일에 광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다. 김대중이라는 동향 출신 정치인의 핍박과 수난을 자신들과 동일시 해 온 광주시민들은 그의 투옥을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기대가 무참하게 좌절된 것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전개과정은 다섯 국면으로 구분되는데 그 국면은 이렇다.
제 1국면은 5월 18일 학생시위에 의한 항쟁의 발단기이다. 휴교령이 내려질 경우 교문 앞에서 집결한다는 사전 결의에 따라 학생들은 18일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 집결했다. 그러나 공수부대의 강력한 저지로 학생들은 광주역에 재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대열이 점차 불어나자 계엄군이 다시 시위진압에 나섰으며, 공수부대의 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계엄군의 무력진압은 첫날의 시위를 해산시켰으나 오히려 시민·학생들의 분노를 야기시켜 시위를 항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제 2국면은 학생시위에 시민이 합세하면서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기 시작한 19일부터 시작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분노한 학생·시민들이 군경과 공방전을 벌이면서부터 시위는 점차 격화되어갔다. 이 시기에 계엄군은 간선도로·주요시설 등을 확보하여 시위대를 포위하면서 대치했고, 이에 따라 시민들은 화염병·돌 등으로 초보적인 수준의 자위적 무장을 시작했다. 제 3국면은 도시빈민·노동자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투쟁의 선두로 나선 20일부터 시작되어 무장항쟁으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신문사·방송국·세무서·파출소 등 공공기관이 습격받았다. 특히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속출하면서 탈취한 소총 등의 무장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시점에서 시위대 대표와 도지사 사이에 협상이 열렸으나 결렬되었고, 계속되는 계엄군의 발포로 사상자가 급증했다. 제 4국면은 카빈 소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시가전에 돌입하고 항쟁이 전라남도권으로 확산되면서 농민들의 참여가 시작된 21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항쟁지도부를 구성한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서 목포·영암·장성·나주 등으로 진출했으며, 22일 오전의 총공세로 도청과 도경에서 공수부대를 몰아내고 광주시내를 장악했다. 제 5국면은 22일부터 계엄군에 의해 광주가 다시 점령되는 27일까지의 시기이다. 광주를 장악한 시위대는 치안확보 등 자치활동을 수행했으며, 23일부터 매일 범시민궐기대회를 열어 투쟁목표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이때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 *상반된 의견 - 1980년 5월 18일부터 10일간 계엄군에 의해 수많은 시민이 살해당하고 폭도로 몰리자 기독교인들은 기도회와 수습대책위원회에 적극 참여했으며, 진실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가 광주시민의 요구를 수렴하기보다는 원상복구와 사태회복에만 주력함으로써 수습대책위원회와 광주시민 사이에 분열이 야기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범시민궐기대회를 통해 수습대책위원회를 규탄하고 25일 새로운 투쟁지도부를 구성했다. 동시에 계엄군의 무력진압에 대비해 시민군을 체계적으로 조직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0시를 기해 외곽도로를 봉쇄하고 탱크 등으로 무장한 계엄군의 대대적인 진압작전으로 10일간의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일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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