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연구주요저작강독 -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제3~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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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제3~4장)
제3장 6.25전쟁과 전시체제(1950~1953)
1950년 6월2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 ‘군사위원회조직에 관하여’를 채택하여 위원장 김일성 아래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부수상 홍명희, 전선사령과 김책, 민족보위상 최용건, 내무상 박일우, 국가계획위원장 정준택 등 6인을 군사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일체의 주권을 군사위원회에 집중시켜 전체 인민과 주권기관, 정당, 사회단체 및 군사기관은 그 결정과 지시에 절대복종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군사위원회는 공화국 내각의 각 성 및 국을 비롯하여 그 밖의 국가중앙기관과 각 도·시의 지방군정부가 배속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결정에 따라 김일성이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임명된 것은 군사위원회 구서 직후인 7월 4일이었다.
군사위원회는 그 인적 구성에서 볼 때 전시행정과 군사 양면에 걸친 최고의사결정기구였지만, 당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정치위원회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움직이고 있었을 것이다. 군사위원 중 김일성, 박헌영, 김책, 박일우 등 4명이 당정치위원을 겸임했지만 소련계로서 당정치위원 겸 조직담당비서인 허가이는 군사위원이 되지 못했다. 당조직을 장악하고 있던 허가이가 1951년 11월 당 중추로부터 좌천되면서 이후 군사위원회와 당정치위원은 실질적으로 일치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 소련에 망명한 과거 북조선 고위층들의 증언이 잇따르면서 소련의 군사원조를 배경으로 한 북조선의 선제공격설은 이제 공식적인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게다가 1994년 6월 2일 러시아정부가 남한정부에 건네준 6·25전쟁 관련문서가 일부 공개됨으로써 소련·중국·북한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6·25전쟁 발발 경위는 어느 정도 명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이 ‘북침’에 대해 ‘조국을 수호한다’는 정당방위의 반격인 한, 현 시점에서 이 부분이 밝혀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전부터 계획적으로 진행시켜 온 선제공격 준비는 내각의 공식 의사결정과정과는 별도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과 최초로 군사지원에 관한 직접 교섭과정을 갖기 위해 모스크바로 동행하여 1949년 3월 5일 스탈린과의 회담에 동석하였다. 1950년 3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회담에 동석하였고, 5월 13일 북경에서 마오쩌뚱과의 회담에도 동석하였다.
개전 3일째인 6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을 완전히 장악햐였다. 27일 미국은 즉각 참전을 결정, 유엔의 결의에 따라 7월 7일 유엔군사령부의 설치가 결정되어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된다.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의해 보급선을 차단당하고 10월 26일 압록강변까지 도달하였다.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면서 전황은 다시 역전되어 미군과 남한군에 타격을 주고 12월 6일 조중연합군은 평양을 탈환하였다.
1950년 12월 21일부터 23일까지 자강도 강계시에서 당중앙위원회 제3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당중앙위원회가 전면에 나서 북조선체제 전체의 진로를 결정하는 장으로 사용된 것은 이 회의가 처음이었다.
전쟁 책임의 초점은 우선 낙동강전선까지 국군을 몰아냈으면서도 결국 돌파에는 실패하여 반격의 시간적인 여유를 준 데 있었다. 특히 적의 후방에서 ㄷ중봉기와 빨치산투쟁이 일어나지 않은 것과, 그 후 유엔군에게 인천상륙을 허용하여 인민군의 괴멸적인 붕괴와 후퇴를 가져와 북조선의 거의 전 지역이 일시 점령된 것이다. 앞의 건에 관해서는 지도부의 상황판단 실패와 동시에 특히 박헌영의 대표하는 남로당계의 책임이고, 뒤의 건에 관해서는 누구보다도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책임이다.
1951년 6월 중순 전선이 38선 근처에서 교착상태에 들어가, 7월 10일 정전회담이 시작되었다. 피점령 상태로부터 탈환하여 통치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생김에 따라 통치 전반을 총 정리할 필요가 제기되었다. 무엇보다도 허가이가 주도한 당원재등록 사업 과정에서 많은 무리가 번해지고 있었다. 그는 노동자 비율을 유지하기 위해 농민들의 입당을 엄격히 하였다. 당중앙정치위원회는 “근로농민을 위리 당에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가장 옳지 못한 일”이라고 지적하였다. 이 회의는 광범한 근로농민들을 끌어들이는 동시에 ㅇ“당의 대중적 성격”을 고려하여 근로농민, 전사, 군관, 또는 인텔리들을 계속 받아들일 것을 결정하고 있다. 1951년 11월 1일부터 2일까지 당중앙위원회 제4차 전원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허가이를 ‘관문주의자’, ‘징벌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 60만 당원 중 45만명을 징벌에 처하였다. 허가이는 당에 관한 사고방식은 노동자계급 ‘성부’ 비율을 중시하는 소련식 엘리트 중심의 전위정당이었다. 이에 대해 김일성은 계급성분보다는 폭넓은 대중적 기반을 중시하는 대중정당을 만들고자 하였다. 허가이는 당부위원장과 제1비서 및 조직부장에서 부수상으로 좌천되었다. 당정치위원직은 유지하였지만 당내실권자로서 그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일성은 허가이에게 맡겨 온 당사업 부문에서 자신의 발판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 1년 뒤인 1952년 12월 15일 제5차 전원회의까지 징벌을 받은 당원의 69.2%가 징벌에서 해제되었다. 총 당원의 40%에 해당하는 45만 명이 신규 입당하여 당원 수는 약 1백만 명에 달했다. 김일성은 새로운 권력기반을 획득하여 1950년 말에서 1951년 초까지 전쟁으로 궁지에 몰린 입장에서 반격에 착수하고 있었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하고 나서 단기간에 놀랄 만한 승리를 거둔 요인으로는 중국측의 치밀한 전술적 준비 외에 현지주민과의 밀접한 관계를 들 수 있고, 유엔군의 배후에서 진행된 유격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본격적인 인민전쟁형의 군대와 유격전형 부대가 결합된 것은 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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