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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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 베이징[北京(북경),Beijing]에 대해
중국의 수도. 정식 명칭은 베이징직할시[北京直轄市]이며, 약칭하여 징[京]이라고도 부른다. 화베이평야[華北平野] 북쪽 끝에 있으며, 동남쪽으로 보하이해[渤海]와 150㎞ 거리에 있다. 전국시대에는 연(燕) 나라의 수도였으며, 초기에는 지[]라도도 불렸다. 후에 요(遼)·금(金)·원(元)·명(明)·청(淸) 나라 등을 거쳐 중화민국 초기의 수도로서 800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1928년 시(市)로 정하고 이름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과 함께 명칭도 다시 베이징으로 고치고 수도로 정해졌다. 면적은 1만 6400㎢이다. 행정구역은 둥청구[東城區]·시청구[西城區]·충원구[崇文區]·쉬안우구[宣武區]·하이뎬구[海淀區]·차오양구[朝陽區]·펑타이구[豊台區]·스징산구[石景山區]·팡산구[房山區]·먼터우거우구[門頭溝區]·퉁저우구[通州區]·순이구[順義區]·창핑구[昌平區]·다싱구[大興區]·화이러우구[懷柔區]·핑구구[平谷區]등 16개 구와 옌칭[延慶]·미윈[密雲] 등 2개의 현(縣)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화와 대외 교류의 중심지이며 국제화된 대도시다. 1929년 교외의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발견된 60만~23만 년 전의 북경원인(北京原人) 화석을 통하여 불을 사용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이후 북방을 포함한 전국의 정치·문화·교통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며, 인재가 흥성하여 숱한 역사적 인물을 배출하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원나라 희곡의 4대 작가 중 마치원(馬致遠)·관한경(關漢卿)·왕실보(王實甫) 등 3명이 이곳 출신이며, 《낙타샹쯔[駱駝祥子]》로 유명한 현대 소설가 라오서[老舍] 등이 있다.
■ 베이징의 자연
서북쪽은 산에 닿아 있고, 남쪽은 평원이다. 전체 면적 가운데 산지와 구릉이 62%를 차지하고, 평원이 38%이다. 지형은 2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① 징시[京西], 베이산구[北山區]: 타이항산맥[太行山脈]의 여맥인 시산[西山]과 옌산산맥[燕山山脈]의 여맥인 교외 북쪽의 쥔두산[軍都山], 교외 동쪽의 베이옌산[北燕山]을 포함한다. 산과 산 사이에는 옌징분지[燕京盆地]와 쥐융관[居庸關], 구베이커우[古北口] 등지의 요새가 있다. 징지[京冀] 경계선을 접한 둥링산[東靈山]은 해발 2303m로 베이징의 최고봉이다. ② 베이징완[北京灣] 평원:융딩강[永定河]과 차오바이강[潮白河]의 충적평원으로서 보하이해를 향하여 서서히 경사를 이루며 해발은 44m다. 기후는 난온대 반습윤 계절풍기후로 여름은 덥고 비가 많이 내리고, 가을은 서늘하고 겨울은 추우며, 봄은 짧고 건조하다. 1월의 평균기온은 5~10℃, 7월 평균기온은 24~26℃, 기온의 연교차는 15~30℃로 대륙성기후의 특징을 띠기도 한다. 무상기간(無霜期間)은 4월부터 시작되어 6개월 반 정도 지속되며, 일평균기온이 안정적으로 0℃와 10℃를 통과하는 날수는 각각 약 260일과 190일이다. 연간 강우량은 500~700㎜이다. 생장기의 농업용수 수요치는 200~300㎜가 부족하다. 재해성기후로 남부는 가뭄과 황사 등이 많이 발생하는 편이고, 서북쪽 산간지역은 여름에 흙·모래·돌이 섞인 물사태가 쉽게 발생한다.
■ 베이징의 역사
베이징은 일찍이 화북(華北) 대평원과 북방의 산간지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서 역사상에 등장하였다. 베이징은 처음에는 ‘계() )’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그 고대취락의 위치는 현재 루거우차오[蘆溝橋]가 있는 곳, 즉 예로부터 융딩강의 도하지점(渡河地點)이 되어왔던 곳에 인접한 지추[ 丘]라는 작은 언덕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평야지대와 산간지대 사이의 교통이 빈번해지자 그 교통로의 요충을 차지한 고대취락이 점차 발전하여, 주대(周代) 초에는 연(燕)나라의 도읍(都邑) 계성( 城)이 그곳에 조영되었다. 진(秦)·한(漢) 이후 당(唐)나라 말기에 이르는 기간에는 대체로 유주(幽州)의 치소(治所)로서 동북변방(東北邊方)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2차에 걸쳐 실패를 거듭한 한민족(漢民族)의 고구려(高句麗) 침략, 즉 수양제(隋煬帝)와 당태종(唐太宗)의 고구려 원정 때에는 다같이 계성( 城)을 그 원정의 전진기지로 삼았고,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뒤 전몰장사(戰歿將士)의 넋을 애도하여 민충사(憫忠寺:지금의 베이징 외성에 있는 法源寺의 전신)를 건립하였다. 오대(五代)에 이르러 요(遼)나라는 938년에 이곳을 부도(副都)로 삼아 남경(南京)이라 하고, 요나라를 물리친 금(金)나라는 처음 연경(燕京)으로 부르다가 1153년에 이곳으로 천도하여 중도(中都)라고 고쳤다. 다시 몽골족이 남하하여 중도성(中都城)을 빼앗은 뒤 쿠빌라이(世祖) 때에 신성(新城)을 건설하고 국도로 정하여 대도(大都)라고 명명하였다. 몽골족이 중국을 통일하여 원(元)나라를 세우자 대도는 중국 전역을 지배하는 정치중심지가 되었고, 마르코 폴로는 칸발릭(Khanbalik)이라는 도시명으로 그 호화로운 번영상을 기록하고 있다. 명대(明代)에는 처음 국도를 지금의 난징[南京]에 두었다가 1420년에 영락제(永樂帝)가 이곳을 국도로 정하고 북경(北京)이라 하였는데, 베이징이라는 명칭은 이때에 비롯되었다. 명대에는 남문(南門) 밖에 외성(外城)을 구축하고 북부의 성역(城域)을 대도 때보다 축소하여 내성(內城)이라 불렀는데, 그 내·외성이 지금의 베이징성의 규모를 이루고 있다.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淸)나라도 1644년 이후 멸망에 이르기까지 이곳을 국도로 하였는데, 만주족과 한민족의 거주지역을 구분하여 내성에 만주족, 외성에 한민족을 살게 하였다. 중화민국(中華民國) 시대에도 계속 이곳을 국도로 삼았으나 북벌(北伐) 완성 뒤 난징으로 천도하여, 이곳을 베이핑[北平]으로 개칭하였다. 194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다시 그 수도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 베이징의 교통
베이징은 주요 간선철도의 기점이 되어, 그들 철도에 의해 티베트·윈난성[雲南省]을 제외한 모든 성(省)·자치구의 중심지와 연결되어 있다. 베이징을 기점으로 산하이관[山海關]·광저우[廣州]·바오터우[包頭]·청더[承德]·퉁저우[通州]·상하이[上海] 등지로 철도가 방사상으로 뻗어 있다. 한편 모스크바·울란바토르·평양(平壤)·하노이 등지에 이르는 국제열차가 있고, 둥청구 남동쪽에 1956년에 새로운 베이징역(驛)이 건설되었다. 공항은 시가지 북동쪽 50km 거리의 순이현에 있으며 국내선과 국제선이 열려 있다. 베이징의 외항인 톈진신강[天津新港]에서 중국의 연안 각성(各省) 및 아시아·유럽 제국과 해상교통이 열려 있다. 시내교통은 주로 트롤리버스와 버스에 의존하고 있는데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1970년에는 전장 23km의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 베이징의 교육문화
베이징은 중국 최대의 학술·문화 중심지이다. 중국과학원의 각 연구소를 비롯하여, 베이징대학교·칭화[淸華]대학교·베이징사범대학·중국인민대학·중국민족학원 등 20여 개의 대학·전문학교가 있다. 또 전국 최대 규모의 베이징도서관·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 및 민족문화궁(民族文化宮)·혁명박물관·역사박물관·중국인민혁명군사박물관 등 문화시설이 많다. 고궁박물원은 옛 명(明)·청(淸)나라의 왕궁이었던 자금성(紫禁城)을 박물관으로 전용(轉用)한 것이고, 역사박물관·혁명박물관은 톈안먼[天安門] 앞 광장 동쪽에 1959년에 완공한 건물로, 같은해에 그 맞은편의 광장 서쪽에 건립한 인민대회당(人民大會堂:국회의사당) 등과 더불어 중국이 자랑하는 10대 건축에 포함된다. 그밖에 국제학술회의장인 과학대회당과 전시관(展示館)·극장·영화관 및 스포츠시설·방송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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